들어가며
의학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같은 자극에 대해 사람들이 개성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자 주변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다.
흔히 의학을 과학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의학은 과학적 연구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크게 발전한 학문"일 뿐 의학을 과학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의학이 보편타당성을 추구하는 과학이라면 같은 질병에 대해 의사들이 내리는 처방은 똑같을 것이며, 그 처방에 따른 결과도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한 과학적 연구 방법을 이용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에 중점을 둔 학문으로, 이렇게 얻은 지식을 서로 개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인문사회학적 성격을 띤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의학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기 위해 씌어졌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환자는 의사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분명한 처방으로 질환을 바로잡아주기를 기대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의 말투나 병원 분위기, 가족이나 의료진과의 관계, 사회문화적 환경 등 수많은 요소가 치료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이 책에서 역사, 미술, 영화와 드라마, 윤리와 법, 문화와 사회, 그리고 첨단과학 등 융합의 눈으로 의학을 바라보게 된 주요 요인이다.
제1장에서는 의학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사고, 즉 인문학에서 출발한 학문이고, 역사적으로 근대에 들어와서 과학적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지금까지 발전해왔음을 살펴보았다. 20세기 초 지금과 유사한 의학교육과정을 도입할 당시에는 과학에 중점을 두고 교육과정을 구성했지만, 현대의학에서는 전보다 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제2장에서는 몇 가지 예를 통해 역사적으로 의학이 탄생하고, 발전한 과정을 기술했다. 과학적 사고에 바탕을 둔 실험적 연구에서 의사와 환자의 밀접한 관계가 도움이 되기도 하고, 세월이 흘러 질병 양상이 바뀌자 패자인 것처럼 보였던 의학자의 이론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의학의 다양한 측면을 단순하게 하나의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합리함을 설명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만한 위대한 발견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논쟁'이라는 검토 과정을 거친 후에야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제3장에서는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의학을 살펴보면서 미술가들이 보여준 의학의 모습이 당시의 시대상, 의학관, 질병관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해부학에서처럼 생생한 그림을 남겨줌으로써 의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미술작품에 등장한 의사나 질병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4장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의학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극적 요소가 중시되므로 외과가 흔히 등장하며, 과학수사 드라마에서는 깊이 있는 법의학과 법과학 지식이 리얼리티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또한 시청자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작품을 통해 질병은 물론 환자와 의사가 접하게 되는 의료환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고, 현대의학에서 이용되는 신기술에 대한 지식을 얻기도 한다.
제5장에서는 윤리와 법이 의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소개했다.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윤리의식이 강조됨에 따라 이에 대한 법제화가 이루어지고, 의학 지식과 의료 기술이 발전할수록 윤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는 점점 늘어난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윤리와 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특히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의료진의 윤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제6장에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이 추구해야 할 내용과 사회 및 문화가 의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했다. 사회문화적 환경은 의학과 의료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치며, 의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의료제도와 개인의 건강문제 해결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아울러 환경, 저출산과 고령화, 건강보험 제도 등의 사회현상은 의학 및 의료의 질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제7장에서는 현대의 첨단의학에서 마주치게 되는 내용을 소개했다.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신약으로도 치료 불가능한 미생물이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감염병 예방을 위한 백신이 앞으로는 만성병 예방에도 활용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인위적으로 유전자 조작 기술에 의해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막아야 하고, 난치병 해결을 위한 유전자치료법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음을 적시했다. 지금까지 통계에 의한 의학을 적용한 것에서 벗어나 개인별 차이를 감안한 맞춤의학이 곧 가능해질 것이며, 정보기술의 발전이 미래의 의료를 크게 바꾸어놓을 것으로 전망했다.
흔히 의학을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라 하지만 실은 우리 생활 곳곳에 숨어 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행동이나 생각이 의학과 관련이 있고, 이런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개인의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에 과학적 의학을 배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날 전 세계 의과대학에서는 과학적 의학 외에 인문학적 의학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의학은 건강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의학의 주된 역할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사람의 상태를 바로잡아주는 것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은 그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 교육부가 2018년부터 고등학교에서 문과, 이과 통합교육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비롯하여 '융합', '통섭'과 같이 각 학문 간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과학적 의학에서 벗어나 의학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특히 미래의 '좋은 의사'를 꿈꾸며 의학적 배경지식을 알고자 하는 중, 고등학생 및 의료인문학적 접근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의학 전공자, 그리고 우리의 몸과 관련된 의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현직에서 의학도들과 함께 의학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만큼 독자들께서도 의학의 폭넓은 세계를 마음껏 즐겨주시기를 기대한다.
P.43
과학에 바탕을 두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은 의학의 중심이 환자에서 질병으로 옮겨가면 갈수록 의사가 환자의 고통에 무관심해지고 오로지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이상 징후에만 집중한 채 환자를 기계 대하듯이 하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다. 각종 의료 기술의 발전이 의학 발달에 공헌한 것은 분명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돌보기보다 질병 치료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성 상실의 위험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인문학적 의학이 강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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