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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ang 독서노트] 역사저널 그날(5.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독서노트

by C.Sang 2020. 12. 2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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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번 책에서는 광해군과 인조 대의 격변의 정치사와 두 차례의 호란,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광해, 왕이 되지 못한 남자'는 광해군을 위한 변명의 성격이 강하다. 검증된 폭군 연산군과는 달리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쳐 난국을 수습했고, 대동법과 같은 개혁적인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폐모살제'는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그를 '혼군'으로 기억하게 했다. '허준, 동의보감을 완성하다'에는 허준의 의학적 집념과 [동의보감]의 집필 배경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이 선조와 광해군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간행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허균, 능지처참당한 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처형당한 과정을 담았다.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추구한 허균의 자유분방함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다. 1623년 3월 광해군 정권의 몰락과 인조 정권의 성립 과정을 소개한 '인조, 반정을 일으킨 그날'은 인조반정이 결국 서인과 북인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반정 세력의 내분으로 이어졌다.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 그 예다. '이괄 반란의 칼을 들다'는 반정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자신을 의심하는 서인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벌어진 변란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이괄의 난은 관군의 반격과 내분으로 초라하게 마무리됐지만 인조 정권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인조 대 있었던 두 번의 전란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국왕이 의리와 명분만으로 나라를 운영할 때 그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큰 치욕을 당하는가를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이 책에서는 위기의 시기 저마다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왕과 신하, 장군, 백성들의 모습이 패널들의 다양한 생각과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난다. 격동의 역사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광해, 왕이 되지 못한 남자

인조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광해군의 죄목은 숭청배명과 폐모살제였다. 그것은 각각 외교와 내치의 실정을 지목하고 있다. 먼저 숭청배명으로 규정된 광해군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사건은 1619년 싸얼후전투다. 후금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중국 동북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명은 더 늦기 전에 제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후금의 수도 혁도 아랍[허투 알라]을 치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에 명과 후금의 운명이, 다시 말해 동아시아 국제를 질서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보낸 데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선 조정의 신하 대부분은 파병에 적극 찬성했다. 임진왜란 때 받은 명의 도움을 재조지은으로 칭송하던 상황에 비추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은 망설였다. 냉엄한 국제 질서와 당시의 세력 판도를 정확히 파악한 인물은 광해군이 거의 유일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병은 끝내 이뤄졌다. 1619년 조선은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 아래 1만 3000명의 대군을 보냈다. 강홍립은 한성부우윤, 순검사 등을 지낸 60세의 노성한 인물이었다. 조선군은 2월 압록강을 건너 3월 첫 결전지인 싸얼후에 도착했다. 그때 조명 연합군은 2만 명 정도였다.
유명한 팔기가 주축을 이룬 후금의 전력은 강했고, 승부는 금방 갈렸다. 후금군은 먼저 명군 1만여 명을 섬멸했다. 조선군은 조총과 포를 쏘며 저항했지만 패색이 짙어지자 도원수 강홍립은 본대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런 행동은 상황을 봐 피해가 커지기 전에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정 세력이 보기에 이런 강홍립의 처신과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사대 의리와 재조지은을 저버린 배덕일 뿐이었다.
다음으로 내치의 패행으로 지목된 것은 폐모살제였다. 광해군을 따라다닌 가장 큰 약점은 빈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광해군의 취약한 정통성은 1606년 적정자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했을 때 영창대군은 겨우 세 살이었지만, 왕위를 위협하는 가장 주요한 인물이었다.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왕실의 상황은 끝내 비극적 사건을 불러왔다. 그 시작은 1613년 서양갑, 박응서 등 서출 7명이 역모를 꾸몄다는 칠서의 난이었다. 이 사건은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폐를 거쳐 결국 광해군의 폐위, 곧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동안에도 몇 차례 역모가 발각되었지만, 이 사건은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서출들을 동원한 것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결론을 이끌어 낸 사람은 대북 강경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이첨이었다. 여덟 살밖에 안 된 영창대군이 그 '역모'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했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그는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지만, 곧 최종 처결이 내려졌다. 그것을 주도한 인물도 이이첨이었다. 1614년 봄 영창대군은 아홉 살 어린 나이로 강화도에서 살해되었다. 사건의 불꽃이 인목대비에게 번진 것은 논리적 귀결에 가까웠다. 1618년 대비는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었다. 1623년 4월 반정 세력은 이런 광해군의 행위를 폐모살제로 규정하면서 거사했고, 조선왕조의 운명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허준, [동의보감]을 완성하다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이것이 그 놀이의 규칙이다. 당신에게는 육체가 주어질 것이다. 좋든 싫든 당신은 그 육체를 이번 생 동안 갖고 다닐 것이다."[셰리 카터 스콧,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이 글대로 우리의 몸은 우리가 삶을 마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내 몸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해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몸은 대단히 민감하고 때로는 매우 연약하다. 작은 상처가 나거나 체온이 조금만 바뀌어도 상당히 불편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푹 자고 일어나 몸이 개운하면 마음도 활력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몸은 우리의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이 담긴 섬세한 그릇이다. 이런저런 변화에 쉽게 흔드리지 않는 건강하고 안정된 몸과 마음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은 그래서 인간의 오랜 바람이자 목표가 되어 왔다.
의학은 그런 목표를 이루려는 의지와 도전의 과학적 결정이다. 유사 이래 세상의 수많은 지성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탐구해 다양한 비밀을 밝혔다.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 것처럼, 도양과 서양은 의학에서도 서로 다른 경로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의학인 한의학은 동양 의학에서 독특하고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고 평가된다.
전근대 한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허준과 이제마일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자신이 뛰어난 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이라는 불후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허준은 그때까지 축적된 한의학 지식을 집성한 [동의보감] 편찬을 이끌어 한의학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허준은 1571년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평생을 의관으로 살았다. 그는 국왕을 수없이 입진 했는데, 1575년 2월과 1587년 10월 선조를 치료하고 1590년 12월 왕자의 천연두를 낫게 한 것이 높이 평가된다. 왕자의 천연두를 치료했을 때는 그 공로로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대간은 중인인 의관에게 넘치는 대우라고 반대했지만, 선조는 뛰어난 의술에 합당한 보상이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준의 삶에서 가장 큰 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군인과 의사다. 군인은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하고, 의사는 거기서 양산돼 환자를 치료한다. 전쟁은 거대한 파괴 행위지만, 그 파괴를 극대화하거나 파괴를 신속히 복구하려는 목적에서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기도 한다. 의술도 마찬가지다. 전쟁을 거치면서 더 많은 환자를 좀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개발, 보급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동의보감]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전쟁이 잠시 잦아든 1596년 허준은 선조의 지시로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동의보감] 편찬에 착수했다. 동기는 앞서 말한 대로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추진된 편찬은 순조롭지 않았다. 작업은 이듬해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재개되어 마침내 1610년에 마무리되었다. 15년이 걸린 긴 역정이었다.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다섯 편으로 이뤄진 [동의보감]은 그때까지 축적된 한의학 지식을 망라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내경에서는 오장육부 등 내과적 치료를 다뤘고, 외형에서는 의과적 의술을 서술했다. 잡병은 소아과, 부인과를 비롯한 그밖의 질병을, 탕액과 침구는 본초학과 침구학을 논의했다. 허준이 77세까지 장수한 사실은 그의 의술이 탁월했음을 웅변하는 증거일 것이다.

허균, 능지처참 당한 날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일생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앞의 기록은 [광해군일기]를 쓴 사관의 기록으 로 여기에서 지칭하는 그는 바로 허균이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허균이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허균은 선조에서 광해군 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개혁가였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 갔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흔치 않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허균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에는 한결같이 허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만큼 허균은 개성이 강하였고 과격하고 독단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조선 중기에 허균처럼 개혁 지향적인 인물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허균은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과는 달리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서학[천주교]에까지 두루 관심이 깊었다. 허균이 성리학의 이론 논쟁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모순된 사회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여러 학문과 사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학문과 사상에 대한 허균의 개방성은 당시의 사회 모순을 과감히 지적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허균의 사상은 논설을 통해 사회 개혁 의지로 구체화되었다. [관론]에서는 관원이 너무 많아 기구와 관료를 줄여 국고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요즈음 성행하는 구조 조정과도 비슷하다. [후록론]에서는 관리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로 후한 녹봉을 주어야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병론]에서도 모든 계층에 고르게 군역의 의무를 부과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개혁 의지가 가장 잘 피력된 글은 [유재론]과 [호민론]이다. [유재론]에서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지 않는 조선 사회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호민론]에서는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라고 전제한 뒤 백성을 호민과 원민, 항민으로 나누고,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인 호민이 현실을 적극 비판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 '국왕은 배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하게 한다. 허균의 이러한 주장들은 강력한 혁명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허균이 역모 혐의로 생애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처럼 급진적인 성향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허균의 비극은 모순된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하였다. 허균의 비극적 삶을 통해 개혁적 지식인이 딛고 선 사상의 토양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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