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번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모두 한국사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과 관계된 것이다. '조선 통신사 상반된 보고 하던 날'은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내부 사정을 살폈던 조선의 정세를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안일하게 대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임진왜란 개전, 일본군 부산에 상륙하다'에서는 부산진과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일본군이 파죽기세로 북진하는 모습관 신립 장군이 이끈 조선의 관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위태로워진 조선의 운명을 그렸다. 관군의 무기력한 패배와 선조의 피란으로 이어진 암울한 상황에서 조선을 구한 것은 해전 불패의 신화를 이룬 이순신 장군과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의 허를 찌른 의병의 활약이었다. 3장 '조선의 반격, 바다로부터 시작되다'는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숱한 영둥들의 이야기다. 이어지는 4장 '정유재란, 일본군 다시 조선을 침략하다'는 1597년에서 1598년까지 벌어진 정유재란의 배경과 주요 전투들을 소개하고 있다. 5장과 6장은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과 그가 임진왜란을 반성하며 쓴 [정비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재를 볼 줄 알았던 류성룡은 전란 직전 이순신과 권율을 요직에 추천함으로써 위기 극복의 전기를 만들었고, 훈련도감 설치, 면천법과 작미법의 실시 등 전란 수습 위해 다양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이외에도 [정비록]이 일본에 유출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부터 평양성 전투의 구체적인 장면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7장 '광해군 세자 책봉되던 날'에서는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와 갈등을 겪는 과정이 심층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번 책에서는 왕과 관료, 장군, 백성들이 전란의 위기에 대응하는 모습들이 패널들의 다양한 생각과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전란 과정에서 드러난 선조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을 지혜가 필요하다.
이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를 두루 섭렵하고 영상 매체로 역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의 열정과 노력이 무엇보다 크다. 특히 방송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쉬운 언어로 대본을 써 준 김세연, 최지희, 홍은영, 김나경, 김서경 작가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책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함께 진행을 하고 있는 최원정 아나운서와 류근 시인을 비롯하여,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셨던 전문가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필자는 [역사저널 그날]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가하여 지금까지 출연하고 있는 인연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크다. 이 책을 통해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그날'의 역사로 들어가 당시 인물과 사건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역사를 통찰해 보기를 권한다.
조선통신사, 상반된 보고 하던 날
임진왜란의 역사적 무게는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에서 가장 또렷하다. 그 사건은 그런 획선이 될 만큼 기간과 규모와 영향 모두 거대한 전쟁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은 끔찍하고 처참한 죽음과 죽임으로 채워졌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된 지 꼭 200년 만에 일어났다. 그동안 조선은 큰 전란을 겪지 않고 오랜 평화를 누렸다. 그것은 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안일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조선의 상황은 뒤쪽에 가까웠다.
혼란의 조짐은 전란 1년 전인 1591년 3월에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보고가 엇갈린 데서 감지된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아룄다. 서정관 허성은 황윤길의 의견에 찬성했다. 일본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는 시각도 달랐다.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으니 담력과 지혜를 겸비한 사람 같았다"고 보았고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라고 판단했다. 이런 엇갈림에는 그들의 당파가 서인과 동인으로 달랐던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조선의 외교를 담당한 두 인물이 이렇게 상반된 의견을 내놓은 사실은 어려운 전황이 전개될 것을 예측케 한다.
임진왜란의 발생 원인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정복 야망이라는 이념적 배경부터 전란이 끝나자 직업을 잃은 무사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려는 현실적 필요, 명과의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제적 목적까지 다양하게 지적된다. 거대한 전쟁이 일어난 데는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여 척의 배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시작되어 1598년 11월 종결되기까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그 영향도 지대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란이 끝난 뒤 명과 일본 모두 왕조나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침체했던 명은 참전 뒤 더욱 허약해졌고 결국 멸망했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수립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무너질 때까지 250여 년간 존속하면서 일본의 중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쟁터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쓰러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조선은 체제를 수습했고, 그동안 지내온 것보다 더 오랜 기간을 존속했다.
7년 동안 전국이 유린되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임진왜란은 그때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가운데 가장 크고 참혹했다고 말할 만하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여러 측면에서 350여 년 뒤 한반도에서 발발한 또 한 번의 거대한 전쟁과 비슷했다. 우선 전쟁의 조심이 적지 않게 나타났지만 충분히 대비하지 않아 개전 초기 연패를 거듭하며 국토의 끝머리까지 쫓겨 갔다는 사실이 그렇다. 전황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아군 쪽으로 전세가 역전된 결정적 계기는 외국군의 참전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소모적 대치와 살상이 지속된 후에야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 뒤에는 정신적 격변이 몰려왔다. 참전해 도와준 외국을 일정 기간 숭배에 가까운 태도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한국사의 크나큰 수난이자 비극인 임진왜란을 일본이 일으켰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빚어 온 갈등에 더욱 깊은 골을 만들었다. 그 골은 긴 시간이 지난 21세기에도 좀처럼 메워지지 않고 오히려 깊어지는 것 같다.
임진왜란 개전, 일본군 부산에 상륙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700여 척의 함선을 앞세운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593년 1월 명군이 참전한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기까지 조선은 육전에서 참담한 패배와 후퇴를 거듭했다. 유일한 희망과 위안은 이순신이 이끈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었다.
상륙 이틀 만에 부산진과 동래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했다. 1년 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들의 엇갈린 보고에서 이미 또렷이 나타났지만, 조선의 허술한 대비는 전쟁이 터지자 더욱 처참함게 노출되었다. 조선 조정은 침략이 시작된 지 나흘 뒤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주요한 첫 응전은 탄금대에서 이뤄졌다. 조선군을 이끈 장수는 신립이었다. 그는 1567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면서 야인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친 조선의 대표 장수였다. 그는 조선의 국운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4월 26일 신립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맞서 이틀 동안 격전을 벌였지만 불리한 기상과 일본군의 조총을 이겨내지 못했다. 조선군은 8000여 명이 전사했고, 신립 또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일본군은 더욱 거침없이 진격해 5월 2일 마침내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은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도 안 돼 수도를 빼앗긴 것이다.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몽진을 결심했다. 조선 조정은 국왕과 100여 명의 신하만 남은 초란 규모로 피란길에 올랐고, 6월 22일 국토의 북쪽 끝인 의주에 다다랐다.
국왕과 조정이 버리 떠난 도성이 유린된 것은 당연했다. 그 주체는 물론 일본군이었지만, 조선 백성도 적지 않게 가담했다. 백성들은 텅 빈 궁궐에 불을 지르고 장례원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전쟁으로 엄습한 거대한 혼란은 억눌렸던 백성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시공간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도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잠시 쉬면서 전열을 정비한 뒤 다시 북침에 나섰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평안도로 갔고, 가토 기요마사 군은 함경도로 갔다. 고니시 군은 6월 평양을 점령했고, 가토 군은 함경도를 유린하면서 관찰사 유영립관 임해군, 순화군을 사로잡았다.
관군은 무너졌지만 조선에는 의병이 있었다. 첫 의병은 1592년 4월 2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기의한 곽재우 군이었다. 한 달 남짓 뒤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를 중심으로 김면, 정인홍 등이 이끄는 의병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기습 공격으로 곳곳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육지에서 관군의 주요한 승리는 개전 석 달 째인 1592년 7월에 벌어진 이치 전투였다.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과 동북현감황진 등은 충청남도 금산의 서쪽 이치에서 고바야키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을 맞았다. 그때 일본군은 전주를 함락시키기 위해 웅치와 금산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두 곳에서는 일본군에 패배했지만 이치에서는 격전 끝에 승리했다. 10월에는 진주 대첩으로 불리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끈 관군과 백성들이 열 배에 가까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도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신화적인 승리를 이어갔다. 일본군의 일반적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바다의 수군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긴 소모전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반격, 바다로부터 시작되다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도성이 함락될 정도로 일방적으로 패주하던 조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반격을 시작했다. 그 주체는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과 곽재우, 김덕령 등이 이끈 의병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1598년 11월 노량 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이순신의 신화적 승리는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에서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그의 첫 승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관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20여 척을 격파하고 일본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전은 계속 이어졌다. 그 첫 정점은 1592년 7월에 치른 한산 대첩이었다. 명량 해전과 함께 이순신이 치른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전투로 손꼽히는 한산 대첩은 '대첩'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큰 승리였다. 이순신은 여기서 유명한 학익진으로 적선을 포위한 뒤 일거에 섬멸하는 탁월한 전술을 구사했다. 거북선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끈 일본군은 73척 가운데 59척이 격침되는 참패를 당했지만 조선 수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수군의 활약은 열세로 기울던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육지에서도 승전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육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진주 대첩과 행주 대첩이었다. 이 두 전투는 한산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승리로 꼽힌다.
두 번의 진주성 전투는 엄청난 혈전이었다. 1차 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동안 펼쳐졌다. 진주를 공격한 일본군은 3만여 명이었지만 방어하는 조선군은 3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군의 절대적 수적 열세 속에서도 전투가 일주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전투의 치열함을 짐작케 한다. 전투를 지휘한 진주목사 김시민은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지만, 조선군과 백성은 엄청난 피해와 고난을 이기고 끝내 진주성을 지켰다. 1차 진주성 전투는 이순신의 해전 승리와 함께 곡창인 전라도를 지키는 중요한 방패가 되었다.
진주성 전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9개월 뒤 일본군은 복수전을 감행했다.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2차 전투도 혈전이었다. 도원수 김명원과 진주목사 서예원 등이 이끈 조선군은 이번에도 굳세게 맞섰지만, 끝내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2차 진주성 전투가 낳은 또 다른 영웅은 논개다. 그녀는 진주 남강 변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 축하 잔치에서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순국했다.
임진왜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1593년 1월의 평양성 전투다. 이 전투는 수세였던 육지의 전황을 공세로 바꾼 중요한 계기였다. 1월 6일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한 관군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4만 명은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 전투에는 휴정과 유정이 이끈 승군도 합세했다. 조명연합군은 사흘간 평양성을 맹렬히 공격했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성을 버리고 한양 쪽으로 퇴각했다. 조선은 7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 전투로 전황은 역전되었지만, 전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1593년 3월부터 길고 지루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기간은 수탈과 살육의 소모전으로 채워졌다. 거기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모든 전쟁에서 그럴 테지만,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정유재란, 일본군 조선을 다시 침략하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정도 만에 장기전으로 전환되었다. 1593년 3월부터 시작된 강화 교섭은 4년에 걸친 조선, 명, 일본의 지루한 줄다리기와 속고 속이는 음모 끝에 끝내 결렬되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까닭은 일본의 강화 조건이 황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고 감합무역[감합은 입국을 확인하는 행위로, 당시 조선과 명이 일본, 여진 등과 시행한 무역이다]을 재개하며, 조선의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와 대신 열두 명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협상은 주로 명 대표 심유경과 일본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는 유명한 승장 유정[사명대사]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유정은 네 차례에 걸쳐 일본과 강화 회담에 나아가 의견을 조율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이려는 시도가 발각되면서 협상은 끝내 깨졌다.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선봉 부대가 울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의 두 번째 단계인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임진년의 전란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에서도 조선은 시작부터 큰 위기를 맞았다. 이번의 위기는 바다에서 닥쳤고, 조선이 자초한 것이었다.
1597년 1월 조선 조정은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전격적으로 파직했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ㄹ급습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이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을 명령받고 풀려났다.
이순신의 후임은 원균이었고, 그것은 크나큰 패착이었따. 7월 원균은 조정의 명령대로 부산을 공격했다가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역인 칠천량으로 도피했다. 일본 함대는 궁지에 몰린 조선 수군을 기습해 160여 척의 전함을 파괴하고 1만여 명의 수군을 살상했다. 사실상 조선 수군이 사라진 참혹한 패배였다.
일본군은 그동안 유린하지 못한 전라도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들은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북상했다. 모든 전투가 참혹하지만, 이때 남원성 전투는 특히 잔인했다 일본군은 남원성에 있던 백성 1만여 명을 몰살했다.
그러나 조선의 운명은 다하지 않았다. 나라를 구한 인물은 이번에도 이순신이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임명 교서에서 선조는 "지난번의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이순신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열세 척이었다. 그는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명량 해전에 나아갔고 스스로 '천행이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절대적 열세의 전투에 임하는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그대로 담겨 있다.
길고 거대한 7년 전쟁은 이듬해 11월 마침내 끝났다. 앞서 말했듯 임진왜란은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명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결국 멸망했다. 이런 대륙 질서의 변동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명의 참전을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으로 기렸고, 현실을 외면한 이상의 추구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전란을 불러왔다.
류성룡,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날
조선의 명재상,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 류성룡,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 외가인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나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관직 생활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후에는 남산 묵사동, 즉 현재의 남산 한옥마을 인근에서 생활했다. 16세 가을에 향시에 급제했고, 19세에는 관악산에서 [맹자]를, 20세에는 고향에 돌아가 [춘추]를 읽었다. 1562년 21세 때,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을 배알하고 그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등을 배웠다.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수제자라는 사실은 류성룡의 정치적 성장에 큰 힘이 됐다.
1564년 7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고, 1565년 성균관에 들어갔다. 25세가 되던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진출하여 1567년 8월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1570년에는 수찬, 정언 등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1571년 가을에 호를 서애라 하였는데, 서애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쪽 절벽을 뜻하는 말이다.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의 여파로 동인 내에서 당파가 갈리자 정인홍, 이산해가 중심이 된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1590년 5월 우의정에 올랐으며, 1591년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면서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였다. 종 6풍에서 정 3품으로 무려 일곱 품계나 오른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행주 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한 사람도 바로 류성룡이었다. 이순신과 권율,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두 영웅의 활약 뒤에는 인재를 알아보는 류성룡의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반발하자 류성룡은 좌의정과 병조판서,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수복에 대해 논의하였고, 평양서 탈환 후 명나라가 일본군과 강화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적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하였다. 1593년 10월 선조를 모시고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수기의 십조 [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 목]등을 올려 구체적인 전쟁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류성룡은 전쟁 기간 중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설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는 면천법, 지방의 특산물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작미법 등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의리와 명분에만 집착하지 않고 실용과 경제에도 주력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류성룡은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순시하며 전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와 지휘관 양호 사이의 내분으로 일어난 '정응태 무고 사건'으로 인하여, 류성룡은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11월 19일 파직되고 만다. '주호오국[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망칭]'이 탄핵의 주된 이유였다. 안타깝게도 1598년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바로 그날이었다.
불명예스럽게 파직당한 류성룡은 1599년 2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징비록]의 집필에 착수한다. 1604년 7월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나, 류성룡은 왕명을 받고 그의 초상을 그리러 온 화공을 돌려보낸다. 이후에는 주로 집필 활동에 전념하다가 1607년 5월 13일,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징비록]
"한양과 지방에 기근이 심한 데다가 군량미를 운반하느라 지친 노약자들이 도랑에 굴러다니고, 건강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으며 역병까지 겹쳐서 거의가 다 죽었다. 부모 자식과 부부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고, 사람 뼈가 들불처럼 흩어져 있었다."
1593년 4월, 한양이 수복된 후 이곳을 찾은 류성룡의 눈에 비친 백성들의 처절한 모습이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징비록]은 저자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책이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 편에 나오는 '여기정이비후환[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류성룡은 서문의 첫머리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저술했음을 밝혔다. 또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목숨을 붙여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왕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라는 구절에서 임진왜란 때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면서도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징비록]을 집필하게 된 중요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의 일을 대강 기술하니 이것이 얼마가량 되었고, 또 장계, 상소, 차자, 문이와 잡록을 그 뒤에 부족했다"라는 문장은 [징비록]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류성룡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과 장계와 상소문 등을 종합한 기록임을 보여 준다.
물론 임진왜란을 다룬 기록이 [징비록]뿐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저자인 류성룡이 전란 당시 조선의 국정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영의정, 병조판서, 도체찰사 등 최고 직책을 두루 맡아 전쟁의 전개 상황, 명군의 참전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징비록]은 전쟁의 경위와 전황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과 전란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이순신을 비롯하여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평까지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징비록]은 현존하는 임진왜란 관련 기록물 가운데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자료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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