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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ang 독서노트] 역사저널 그날(3. 연산군에서 선조까지)

독서노트

by C.Sang 2020. 12. 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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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그날'로 들아가 보는 즐거움


우리 역사 속에서 '역사를 바꾼 결정적 그날'로 언제를 꼽을 수 있을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한 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 등 많은 날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역사적인 그날이 있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회적 모순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대응이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은 다양한 패널이 우리 역사를 바꾼 그날로 들어가서 당시 상황을 소개하고 자신을 소회를 피력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프로그램으로 출발했다. 그동안 KBS에서는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한국사] 등 많은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지만 토크 형식으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도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역사와 이야기의 만남'은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고, [역사저널 그날]은 역사 교양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 책은 '그날'의 배경을 먼저 서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운 후 방송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주요 내용을 압축한 소제목을 제시하여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게 했고, 필요에 따라 관련 사료와 도판을 삽입하여 방송에서 다룬 영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이번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번의 사화로 정국에 피바람을 몰고 온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내관 김처선은 연산군의 엽기적인 폭정에서 죽음으로 저항했다. 1506년 9월 중종이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날은 조강지처 단경왕후가 폐위되는 비극의 날이기도 했다. 명종 대인 1559년에서 1562년 전국을 휩쓴 도적 임꺽정의 반란은 '흩어지면 백성이 되고 모이면 도적이 되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선조 시대,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기축옥사로 1000여 명의 선비가 희생되었다. 여름방학 특집으로 방송되었던 교육과 과거를 통해서는 지금 못지않았던 조선 시대 교육과 시험의 열기를 접할 수 있다. 과거 시험에서의 지역별 할당제의 적용, 성균관 유생들의 출석 점검 등은 현재와 비교해도 흥미롭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승정원일기]는 [실록]과 더불어 숨어 있는 조선 역사의 면모들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승정원일기]의 완역이 빨리 이루어져 [역사저널 그날]의 콘텐츠도 더욱 풍부해졌으면 한다.
이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를 두루 섭렵하고 영상 매체로 역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의 열정과 노력이 무엇보다 크다. 특히 방송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쉬운 언어로 대본을 써 준 김세연, 최지희, 홍은영, 김나경, 김서경 작가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책은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함께 진행을 하고 있는 최원정 아나운서와 류근 시인을 비롯하여,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셨던 전문가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필자는 [역사저널 그날]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지금까지 출연하고 있는 인연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크다. 이 책을 통해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그날' 역사로 들어가 당시 인물과 사건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역사를 통찰해 보기를 권한다.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 병 주



연산군의 몰락, 내시 김처선 죽던 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잠언]의 한 구절은 중요한 진실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한 꺼풀만 벗기면 다 똑같다. 그래서 그 한 꺼풀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배우의 말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사람의 세부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기본 구조는 동일하듯, 사람의 행동도 그렇다. 이런 원리는 역사상의 폭군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의 공통점은 강력한 권력을 지엽적 사안에 탕진한 것이다. 그 사안은 대체로 사치나 유희, 음행 등이다. '주지육림'이라는 성어는 그런 변하지 않는 공통적 행동의 핵심을 담아 냈다.
연산군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그의 궁긍적 목표는 전제 왕권을 구축하고 행사하는 것이었다. 왕정의 원리사 이런 목표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모든 폭군과 마찬가지로, 본질과 지엽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꾼 데 있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강력한 왕권의 수립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했다. 무오사화는 숙청의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볼 때 그리 가혹한 처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 연산군의 정치는 일반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패는 그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강화된 권력을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 목표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집중한 것은 사치, 사냥, 음행 같은 말단적 행위였다. 그는 갑자사화를 전후로 편집증에 가까운 행동을 자주 드러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언론 통제와 관련된 조처다. 그의 목표는 국왕과 관련된 발언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관원이 친족과 국왕에 관련된 의견을 나누다가 적발되면 당사자는 촌참[신체를 마디 내 죽이는 형벌], 부자와 형제는 참형에 처했다. 모든 공문서에는 발언자의 이름을 명기시켰다. 대표적 사례는 신언패의 도입이다. 그 이름 자체가 목적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지만, 새겨진 문구는 더욱 직설적이다. "입은 화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닦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하고 어디서나 굳건할 것이다."
이런 금제를 어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산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래 모셔 온 김처선이라는 환관이었다. 1505년[연산군 11] 김처선은 국왕에게 폭정을 그만두라고 간언했다. 결과는 당연히 처형이었다. 그 뒤에 내려진 조처는 가혹함을 넘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연산군은 관원 및 군사의 이름과 모든 문서에서 그의 이름에 들어있는 '처'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24절기의 하나인 '처서'를 '조서'로 고치고, 그 글자가 사용한 성몽정을 처벌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 조처는 결국 음운만 고쳐 쓰는 것으로 변경됨으로써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
연산군의 치세가 최초의 반정으로 종결된 것은 거의 불가피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반정은 쉽게 성공했다. 1506년 9월 1일 저녁, 동대문 부근 훈련원에 집결한 반정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경위와 추대 의사를 아뢴 뒤 3경[밤 11~1시]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연산군은 순순히 옥새를 내놓았다. 창덕궁의 상황을 종결한 반정군은 경복궁으로 가서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 씨에게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시켰다는 사실과 진성대군을 옹립하겠다는 계획을 아뢰었다. 대비는 윤허했고, 그날 신시[오후 3~5시] 진성대군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연산군의 운명도 곧 결정되었다. 그는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31세의 젊은 나이였다.


중종, 강제 이혼 당한 날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지만 중앙 정치는 안정보다 격동의 과정이다. 중종의 즉위는 특히 그런 현상의 결과였다. 16세기 초반 조선의 국정은 12년에 걸친 연산군의 폭정으로 크게 무너졌다. '올바른 데로 돌아간다'라는 '반정'의 의미가 알려 주듯, 중종은 헝클어진 국정을 수습해 중흥을 이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안고 즉위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첫 걸림돌은 중종이 갑자기 추대된 국왕이라는 사실이었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이른바 '삼대장'을 중심으로 한 반정 주도 세력은 120여 명의 정국공신을 양산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조회 때 삼대장이 나가면 중종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이 무렵 대신의 위상과 중종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이례적 상황은 여러 이례적 사건들을 파생시켰다. 그 가운데 그 뒤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준 사건은 중종의 첫 왕비 신씨가 폐위된 일이다.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 후반 좌의정으로 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연산군에게 협력한 대표적 신하의 딸이 새 왕비라는 사실은 명분으로나 현실로나 반정세력에게 불편한 것이 분명했다. 신 씨는 남편이 국왕에 오르는 기쁨을 맛본 지 7일 만에 자신은 궁궐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겪었다. 이 사건은 신씨가 인왕산 기슭에 건 치마를 중종이 보면서 그리워했다는 '치마바위'의 애틋한 야담을 낳았다.
이 사건이 역사에서 굵게 기록된 까닭은 10년 뒤 조광조가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데 있다. 1514년[중종 9] 9월 큰 번개와 천둥이 치자 중종은 국가 현안에 관련된 의견을 올리라고 하교했다. 이듬해 8월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사 김정은 억울하게 폐비된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긴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반정 세력이 그릇된 판단과 행동을 저질렀다는 민감한 주장이었다.
금기를 건드린 그 발언이 제기되자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국왕은 당황했고 신하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정광필 등 주요 대신은 구언으로 올라온 상소라는 근거에서 박상과 김정을 처벌하는 데 반대했다. 대간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그 상소가 종사의 안위를 크게 위협하는 주장이라면서 엄벌할 것을 요청했다. 상소를 올린 지 보름 만에 박상과 김정은 그런 대간의 의견에 따라 각각 전라도 남평과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되었다.
이 무렵은 조광조의 삶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이 상소가 올아오기 두 달 전 조정에 출사 했고, 박상과 김정은 유배되기 이틀 전 문과에 급했으며, 석 달 뒤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정언이 된 이틀 뒤 조광조는 대간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논점은 두 가지였다. 자유로운 발언이 보장된 구언에 따른 상소를 처벌하면 언로가 막힐 것이며, 발언의 소통과 보장을 가장 중시해야 할 대간이 처벌을 주장한 것은 더 큰 잘못이라는 비판이었다.
벼슬에 나온 지 반년도 안 된 34세의 사간원 정언의 문제 제기로 조정은 더 큰 논란에 휩싸였다. 해를 넘긴 논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광조에게 동의하게 되었다. 대간은 모두 교체되었고 박상과 김정은 유배된 지 1년 3개월 만에 관직에 돌아왔다. 조광조는 즉시 언론권의 새로운 담당자로 떠올랐다. 현실보다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얼마 이어지지 않은 삶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선, 임꺽정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도적'의 이미지는 당연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긍정적 의미가 겹치는 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부정적이라는 방증이다. 이른바 '의적'은 부패가 만연한 혼란기에 나타난다. 한국사에서 임꺽정은 그런 의적의 대표적 인물이다. 억세고 거친 어감을 지닌 그의 이름은 조선 중기 사회사에서 누락할 수 없다. 성호 이익은 그와 홍길동, 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다.
임꺽정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그는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 명종 때 도적으로 활동했다. 그 시기는 자연과 사회 환경 모두 열악했다. 흉년이 여러 해 이어졌고, 정치도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 등의 발호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틈타 지방 관원은 백성을 그악스럽게 수탈했다. 도적의 발생은 어쩔 수 없는 현상에 가까웠다.
임꺽정과 그 집단은 1559년[명종 14] 무렵부터 4년 정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경기도부터 시작해 급속히 세력을 넓혔다. 조정에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에 그들을 잡는 대장을 둔 것은 그들의 폭넓은 활동 영역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들은 관아를 습격해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 주면서 의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임꺽정 집단을 진압하려는 조정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1559년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은 그들의 소굴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죽었다. 임꺽정 집단은 이듬해 서울까지 진출해 장통방[지금의 종로2가]에서 관군을 공격했다. 처자 몇 명이 사로잡혀 황해도 서흥 감옥에 갇히자 대낮에 습격해 구출하기도 했다.
조정의 대응은 1561년부터 강화되었다. 그해 10월 조정은 황해도 토포사에 남치근을 임명했다. 그는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전라도 병마절도사, 한성부 판윤 등을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무장이었다. 남치근이 이끈 관군은 작전을 시작한 지 넉 달 만인 1562년 1월 서흥에서 임꺽정을 사로잡아 효수했다.
인조 때 박도량은 [기재잡기]에서 임꺽정이 사로잡힐 때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치근의 포위가 좁혀 오자 임꺽정은 날래고 건장한 부하만 데리고 궐산 민가에 숨었다가 사로잡혔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앞서 관군에 생포된 참모 서림이 알아보고 고발했다." 그러니까 임꺽정은 가까운 부하의 배반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임꺽정 집단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진단했다. "지금 나라가 선정을 펴지 않고 교화가 밝지 않으며, 재상이 욕심이 멋대로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손발을 둘 곳이 없으며 하소연할 곳도 없다. 가뭄과 추위가 절박해 하루도 버티기 어려워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도적이 되었으니, 그들을 도적으로 만든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대부분의 의적처럼 임꺽정 집단의 활동은 이런저런 영웅적 설화를 낳았다. 이를테면 임꺽정은 한탄강에서 관군에게 쫓기다가 피할 곳이 없게 되면 강물에 몸을 던져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했다거나, 겨울에 눈이 내리면 미투리를 거꾸로 신어 행방을 감췄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조선의 세의적은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그만큼 역동적이고 매력적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정철, 기축옥사 특검 되던 날

한 뛰어난 문필가는 "사람과 글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글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거나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지적은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 지적의 설득력을 보강하는 사례를 자주 만나게 된다.
정철이라는 이름은 우선 뛰어난 문학가로 익숙하다. 그는 '송강가사'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질 만큼 한국 문학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된 인물이다.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어 문학가의 공통적 속성은 대체로 현실과 밀착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뛰어난 문인은 삶이나 생각이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경우가 많다. 이런 측면은 정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의 인물은 대부분 정치가이자 문학가, 사상가였다. 이것은 그들이 그만큼 여러 방면에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 때문이었다. 그 사회를 지배한 근본 원리인 신분제도는 물리적으로 바꿀 수 없는 '몸의 구분'에 따라 그 밖의 거의 모든 가치를 종속시켰다.
정철은 여러 분야에서 우뚝한 인물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문학사가 기록하는 뛰어난 문인이었고 좌의정까지 오른 저명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런 두 광채는 서로 충돌하면서 정철의 삶에 더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정철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 후기를 지배한 당쟁이 시작되던 때였다. 동서 분당[1575]이 일어났을 때 그는 40세였다.
여느 정치적 갈등을 뛰어넘는 충돌과 반목의 격량에 대응하려면 좀 더 유연하고 현실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정철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정철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은 이른바 '정무적'으로 행동하는데 상당한 저해가 되었다. 그는 대부분 직설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는 자연히 잦은 파직과 귀양으로 이어졌다. 그의 문학작품은 대부분 그런 시기의 산물이었다.
정철의 삶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기축옥사[1589]의 처리에 대한 것이다. 그는 동갑인 율곡 이이와 함께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 정철은 대사헌으로 활동하다가 동인의 탄핵으로 고향 창평에서 4년 동안 은거했다. '미인'을 그리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이때의 산물이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때 이이는 별세했기 때문에 정철은 정철은 서인의 영수로 받들어졌다. 위관에 임명된 정철은 사건을 강경하게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최영경, 이발을 비롯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반면 정철은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고 인성부원군에 책봉되어 외형적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정여림이 실제로 모반을 추진했는지는 지금까지 논란에 싸여 있다. 다시 말해서 정철은 좀 더 신중하게 수사했어야 할 사건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다. 이런 직정적 행동은 그의 문학적 감수성과 상당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이 사건에 선조가 가장 크게 개입했다는 견해가 많다. 왕정의 원리나 선조의 정치 운영 방식 등을 생각할 때 타당한 판단이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거의 모두 이중적이거나 다면적인 존재다. 정철이 남긴 문학적 업적과 정치적 행보는 그 도드라진 사례다.



조선을 뒤흔든 교육열

대한민국의 교육열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열심히 위인전을 읽고, 웬만한 도시의 학원가는 밤늦도록 학생들로 넘쳐난다. 최근에는 노인들까지 각종 강연에 몰려다니면서 못 다한 공부를 한다. 조선 시대의 교육 열기도 이에 못지않았다. 선비 집안에서는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에 전념했고, 왕실에서도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왕실에 원자가 태어나면 보양청을 설치하고, 원자 양육에 대한 일기인 [보양청일기]를 남겼다. 4~5세가 되면 강학청을 설치해 교육했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현재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세자시강원은 세종 때 문종의 교육을 위해 처음 설치했는데 최고의 스승들을 비채 하여 차기 왕이 될 세자의 교육을 맡겼다. 성종은 세자 시절 공부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아들 연산군은 엄격하게 교육하지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역시 공부에서 시작되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영조의 질책이 계속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영조는 자식 교육에는 실패했지만, 손자인 정조의 교육에 성공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성군을 탄생시켰다. 왕실 교육을 필두로 조선 시대 양반 사회 전반에 교육 열기가 퍼졌다. 교육이 과거로 연결돼 과거 합격은 가문의 영광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할아버지가 손자의 육아 일기를 쓴 것도 주목된다. 16세기 선비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관료의 꿈을 키워 나갔지만 사화의 여파로 경상도 성주로 유배를 갔다. 가정적인 불운도 겹쳤다. 23세가 되던 해에 혼인하였으나, 아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마마] 등의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하였다. 유배 길에 있었던 이문건에게 희망의 빛이 찾아들었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고대하던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얻은 2대 독자 손자, 이문건의 모든 관삼은 손자에게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가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가 자라나는 모습을 기록으로 담기 시작했고, 이렇게 [양아록]이 탄생했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에 대해, "아이를 기르는 일을 꼭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려고 해도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독하게 거처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습좌, 생치 포복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고도한 귀양살이에 희망을 준 손자의 모습을 글로 남겼다.
왕실 교육부터 할아버지의 손자 교육까지 조선 시대 교육의 다양한 면모들을 접하면서 현재의 교육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승정원일기, 조선의 역사를 깨우다

2015년 현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대한민국의 세계기록유산은 총 11건이다. 아시아에서는 1위이고 세계에서도 3위 안에 든다. 기록을 작성하고 보관한 우리 선조들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시대 승정원에서 국왕이 하루 동안 처리하는 정사의 내용과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의 내용을 종합하여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순종 3]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만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는 자료적 가치와 우수성이 확인되어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국왕의 지시 사항이나 명령을 정부 각 기관과 외부에 전달하고 각종 문서나 신하들의 건의 사항을 왕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승정원 정원 또는 후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후'는 목구멍을 뜻하는 한자어로 승정원이 국왕의 의사를 대변하는 요처임을 암시한다. 182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에는 인정전 동쪽 대청과 문서고 사이에 '은대'라는 명칭으로 승정원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건국 초부터 매일 기록된 일기이므로 일기의 전량이 남아 있다면 640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된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전쟁과 정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나 책의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그때마다 [춘방일기]와 <조보> 등을 널리 수집하여 빠진 부분을 채워 나갔다. [승정원일기]는 매일의 기록이기 때문에 하루, 한 달, 일 년의 정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국왕의 동정을 비롯하여 주요 정치 현안이 되는 자료나 중앙이나 지방에서 올린 상소문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 왕실 주변의 정황이 중심이 되는 만큼 국왕의 건강이나 심리 상태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고, 국왕이 정무를 보던 장소나 국왕의 이동 등을 시간대별로 기록하여 동선 파악이 용이하다.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더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매일의 날씨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날씨는 청[맑음], 음[흐림], 우[비], 설[눈]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전청오후설'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하루 중 일기 변화까지 기록하였다. 288년간의 날씨 기록은 전통 시대 기후 연구뿐 아니라 향후 기후 예측에도 큰 도움이 된다.
현재 [승정원일기]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글로 번역 중이다. 2013년까지 20여 년간 정리하고 번역한 책의 수는 468 책으로, 총 예상 번역 책 수 5000 책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현재 진도대로라면 100년은 지나야 완역을 기대할 수 있다.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예산을 더 투입하여 [승정원일기] 완역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그래야 [승정원일기] 속에 숨어 있는 조선 역사의 전모가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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