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만나면서
문종은 조선왕조가 시작된 뒤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첫 국왕이다. 2대 정종은 차남이었지만 장남 이방우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적장자나 다름없었다. 또 정종의 즉위는 태종의 등극을 예비하는 강요된 선택이었으므로 정상적인 상속으로 보기 어렵다. 조선은 문종의 등극으로 5대 59년 만에 왕위 계승의 정상 궤도에 접어들었다.
문종의 즉위는 여러 면에서 순조로웠다. 우선 부왕 세종은 '황금시대'라는 수사에 합당할 만한 발전과 안정을 이뤘다. 이런 환경은 문종에게 풍족한 정치적 유산이 되었다. 문종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문종은 유학은 물론 천문, 역수, 산술 등 거의 모든 학문에서 뛰어났다. 29세부터 세자로 국정을 대리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것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눈부신 업적을 남긴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했을 때 조선의 앞날은 평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 의외의 결과를 가져온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강건하지 못한 신체라는 문종의 내재적 조건이다. 가뜩이나 불안하던 문종의 건강은 어머니 소헌왕후 심 씨와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을 잇따라 치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과로는 그가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된다.
다음으로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환경이 있었다. 그것은 뒤어난 능력과 적지 않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동생들의 존재였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이었다. 문종부터 안평대군까지 네 살 터울밖에 되지 않는 세 사람은 세종이 통치하는 동안 세자와 대군으로 여러 업무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측면은 문종이 짧은 재위 만에 붕어하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잠재적 위협으로 변했다. 그 가능성은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문종은 1442년부터 세종이 승하하는 1450년가지 국정을 대리했기 때문에 세종 후반의 치적은 문종의 보좌에 힘입은 측면이 컸다. 즉위 뒤에는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편찬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문종은 건국 초기의 군사제도에서 상비군인 12사와 유사시의 부대인 5위가 효율적으로 연계되지 않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12사를 5사로 줄여 방만한 국방 체계를 유기적으로 개편했다.
편찬 사업의 주요 성과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병감] 등을 간행한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연구의 기본 사료인 [고려사]의 완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수정이 거듭된 난산으로 유명하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 정도전, 정총이 편년체로 펴낸 [고려국사]는 조선 개차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고려 후기의 역사를 사실보다 폄하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세종은 즉위 직후 개수를 지시했지만 용어와 내용 등에서 부족한 부분이 계속 나타나면서 좀처럼 진척되지 못하다가 1449년 다시 한번 편찬이 지시된 끝에 문종 1년[1451]에 마침내 완성되었다. 60년에 가까운 [고려사]의 완성 과정은 조선 전기 역사 편찬의 엄정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문종의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도 덧붙일 만하다. 문종에게는 휘빈 김시와 순빈 봉 씨, 그리고 현덕왕후가 되는 권 씨 등 세 명의 세자빈이 있었지만, 휘빈과 순빈은 불화와 음행 등의 이유로 폐출되었고, 현덕왕후는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룻밤의 승부, 계유정난
계유정난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과 함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정치적 변란이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을 무력으로 제거했다.
'난국을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정난'이라는 표현은 사건의 주체와 목적을 뒤바꾼 왜곡이라고 지적할 만하다. 문종이 짧은 재위 만에 붕어하고 12세의 단종이 즉위한 것은 분명히 적지 않은 정치적 공백이자 위기였지만, 난구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세종과 문종의 부탁을 받은 홍보인,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이 팽창한 권력을 갖고 조정에 널리 포진했지만, 그들에게는 왕위를 노릴만한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 시기를 '난국'으로 규정하고 '안정'시키려고 나선 집단은 수양대군과 그 일파였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계유정난의 주요 과정과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1453년 9월 25일 수양대군의 측근인 권람의 노비, 계수의 고발이었다. 계수는 황보인의 노비와 함께 가죽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에게서 황보인이 김종서 등 재상들과 결탁해 국왕을 폐위하고 안평대군을 옹립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고변했다.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시라"고 재촉했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 새벽 한명회, 권람 등을 불러 계획을 밝혔다. "오늘 거사할 것인데, 김종서가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니 내가 역사 한두 명을 데리고 그 집에 가서 베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계획은 거의 그대로 실행되었다. 날이 저물자 수양대군은 심복 양정과 노비 임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그가 "상의할 말이 있다"면서 김종서를 집 밖으로 유인하자 임어을운과 양정이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살해했다.
첫 목표를 이룬 수양대군은 즉시 경복궁으로 가서 입직 승지 최항에게 "도적의 우두머리 김종서 부자를 베어 없앴고, 그 나머지 무리도 지금 아뢰어 토벌하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수양 일파는 곧바로 주요 대신의 숙청에 착수했다. 그들은 대궐과 도성의 경계를 삼엄히 한 뒤 조극관, 황보인 등을 입궐시켜 궁궐 문 앞에서 살해했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김종서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안평대군에게 사태를 알리고 내금위를 불러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여장을 하고 둘째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었지만 곧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수양대군 일파는 김종서를 비롯한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등 주요 대신을 저자에 효수하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냄으로써 정변을 마무리했다.
수양대군은 즉시 조선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정난 바로 다음날인 10월 11일, 그러니까 김종서를 완전히 살해한 때부터 반나절도 안 된 시점에 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 판이병조사라는 긴 직함을 가짐으로써 국가의 전권을 거머쥐었다. 같은 날 정인지, 허후 , 정찬손, 이계전, 홍달손, 신숙주 등 핵심 측근을 요직에 배치해 조정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의 최종 목표인 등극은 정난을 일으킨 지 20개월 뒤에야 완수되었다. 1455년 윤6월 11일 단종은 금성대군의 역모가 발각된 것을 기화로 양위했고, 38세의 세조는 그날로 근정전에서 즉위해 자신의 정치적 숙원을 이뤘다. 단종이 즉위한 때부터 4년 만의 일이었다. 쿠데타의 궁극적 목표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라면, 계유정난은 시작부터 끝까지 1년 반이 넘게 걸린 긴 쿠데타였다.
수양대군, 옥새를 받다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는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등극한 첫 임금이다. 그만큼 그는 이례적인 경로로 즉위한 것이다. 세조는 지울 수 없는 도덕적 오명을 안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인 14년밖에 그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세조의 통치는 상찬과 비판이 특히 선명하게 갈라진다. 그럼에도 세조는 정치, 경제, 국방 등 너른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여럿 남겼다고 평가된다. 정치에서 세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구한 과업은 왕권 강화였다. 그런 노력이 집약된 정책은 육조직계제를 다시 도입한 것이다. 의정부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육조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받도록 한 이 제도는 국왕이 국정을 더욱 강력하게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조는 태종 14 [1414]에 실시됐다가 세종 18년[1436]에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된 이 제도를 즉위 두 달 만에 다시 시행했다. 권력 운영에 대한 세조의 생각은 "총재[정승]의 의견을 듣는 것은 임금이 죽은 제도이며, 의정부의 의견대로 한다면 장차 권력이 옮겨 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발언에 오롯이 담겨 있다.
국정 운영의 핵심을 바꾼 세조는 국왕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의례적 변화도 추진했다. 이를테면 어전에서는 절대 어좌를 등지고 서지 못하며, 명령으로 부르면 전보다 갑절로 빠르게 달려오도록 했다. 어가가 지나가면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군사를 제외하고 칼을 찬 사람은 모두 꿇어앉아야 했고, 임금이 원로 종친이나 대신 등과 만날 경우 세자 이하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세조는 "조회와 연향이 중요한 까닭은 임금과 신하의 예절을 익히기 때문이며 예악과 문물이 소중한 까닭은 임금과 신하의 구분을 굳게 하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경제와 국방을 강화했다. 경제 분야와 관련해 주목되는 시책은 호구 파악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인구 파악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빠짐없이 공정하게 부과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나 당시의 행정력과 기술력 수준을 감안할 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업임이 분명했다.
1461년 7월, 조선 조정은 기존의 호적과 군적을 회수하고 전국의 인구를 다시 조사해 인구 400만 명, 가호 70만 호에 85만 명의 군역 인력을 확보했따. 이것은 조선이 개창된 뒤 처음으로 국가에서 실제 호구 규모를 파악한 업적이었다. 새로운 토지제도인 직전법을 시행하고 백성에게 부과한 공물을 줄인 것도 주목된다. 1457년 3월 세조는 세종 중반에 책정된 공물 가운데 3분의 1을 감축했다. 1466년에는 직전법을 도입해 관원에게 주는 토지의 규모를 줄임으로써 국가 지출을 경감시켰다.
세조의 또 다른 주요 업적은 중아의 5위 제도와 지방의 진관 체제를 시행해 국방력을 강화한 것이다. 5위는 다섯 개의 저예 부대를 두어 수도의 각 부와 전국 각 도의 방어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군사 제도이며, 진관 체제는 각 도의 거점 지역을 위계에 따라 조직한 국방 체계다. 진관 체제에서는 각 도의 최고 군사 지휘관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소재지를 주진으로 삼고, 그 밑에 절제사 첨절제사가 통솔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어 그것을 하나의 진관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거진 아래 동첨절제사, 만호 등이 관할하는 제진을 배치해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군사를 지휘하고 동원할 수 있게 했다. 강화된 조선의 국방력은 1460년과 1467년, 두 번에 걸친 건주여진 정벌로 입증되었다.
끝으로 국가 운영의 근간인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1460년에 호전, 이듬해 형전이 완성됨으로써 조선의 주요 제도는 점진적이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아갔다.
세조와 공신들, 피로 맹세한 날
권력의 비정함을 그대로 보여 준 집권 과정이나 그 뒤의 통치 방식 등에서 세조는 할아버지인 태종을 많이 닮았다. 태종이 그랬듯 세조가 추구한 일차적 정치 목표는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세조는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태종의 선례를 많이 원용했다. 그러나 세조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본받지 못했고, 그것은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태종은 자신과 후계자에게 잠재적 걸림돌이 될 만한 대상은 거의 모두 제거해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세조는 그러지 못했다. 지울 수 없는 도덕적 오명을 무릅쓰고 와위를 찬탈한 부담이 근본 원인이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집권에 공헌한 소수의 공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공신에 대한 의존은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졌고,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증거는 빈번한 공신 책봉이다. 세조의 치세는 '공신 책봉의 시대'라고 부를 만했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에 성공한 뒤 자신을 포함한 정난공신 43명을 책봉한 세조는 즉위 직후[1455] 좌익공신 46명을 선정했으며, 1467년[세조 13] 이시애 난을 평정한 뒤에는 적개공신 45명을 녹훈했다. 여기에 세조 붕어한 직후 발생한 병조판서 남이의 역모를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책봉된 익대공신 39명을 더하면, 세조와 관련된 공신은 173명에 이른다. 조선 거국부터 세조 전까지 60여 년 동안 세 번의 공신이 책봉되었지만, 세조는 자신의 치세에만 같은 횟수의 공신 책봉을 단행한 것이다.
공신은 '양날의 칼'이다. 그들은 주로 왕조 교체나 대규모의 전쟁 같은 큰 변란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공신 책봉은 그런 공로에 대한 치하와 격려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유인과 결속의 장치이기도 하다. 충분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을 때 그들은 이전의 경험을 되살려 또 다른 변란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공신이 자주 대규모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은 그때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많이 일어났거나 유인과 결속이 특히 더 필요한 시기였음을 방증한다. 세조 때의 상황은 이런 측면과 잘 부합된다. 세조는 도덕적 오명을 감수하고 수많은 난관을 헤치며 집권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측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성공한 뒤에는 그들을 충분히 포상해야 했다.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정인지, 정찬손을 비롯한 이 시기 주요 인물은 거듭 공신에 책봉되고 오랜 기간 요직을 장악하면서 시대를 이끌었다. 자연히 그들에게 권력과 재력이 집중되었고, 그것은 긴밀하게 중첩된 혼인과 혈연관계를 매개로 더욱 확대되었다. 세조의 치세가 끝날 무렵 그들은 하나의 견고한 구조를 형성했다.
공신들의 권력 강화는 세조 대 정치에 역설적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왕권 강화를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신하들의 영향력을 강력히 규제했으나 거듭된 공신 책봉과 공신 중심의 정국 운영이 체제 자체를 상당히 허약하게 만든 것이다.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
남이는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 비극의 핵심은 젊은 나이에 이룬 탁월한 경력과 모반 혐의로 처형된 사실의 대조일 것이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7세에 적개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지만, 몇 달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태종의 외증손이자 당대 최고 권세가였던 권람의 사위라는 사실이 보여 주듯 남이의 사회적 배경은 매우 화려했다. 그러나 그는 배경을 넘어서는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이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 전기 문과 그베 평균 연령이 30세 전후였고, 무과도 거의 비슷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취였다.
남이가 무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중요한 계기는 1467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 난이었다. 그때 남이는 혈기 넘치는 27세의 청년이었다. 이시애 군은 관군을 격파하며 철원까지 내려왔다. 세조와 조정은 크게 동요했다. 한명회, 신숙주 등 당대를 대표하는 대신들이 이시애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하루아침에 하옥된 사실은 그런 뒤숭숭한 분위기를 또렷이 보여 준다.
세조 후반의 가장 큰 위기였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결정적 계기는 7월 말의 북청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관군은 전황을 장악했다. 길주로 달아났던 이시애가 8월 12일 영동역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참수됨으로써 반란은 넉 달 만에 종결되었다. 남이는 바로 이 북청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세조실록]에는 "남이가 진 앞에 출몰하면서 사력을 다해 싸우니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그는 몸이 4 ~ 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낯빛이 태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전공으로 남이는 정 4품 행호 군에 임명되고 적개 1등 공신과 의산군에 책봉되었다.
남이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그는 건주여진을 공격해 우두머리인 이만주를 죽였다. 화려한 전공은 급속한 승진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종결된 직후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반년 뒤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했으며, 한 달 뒤에는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 28세에 국방을 총괄하는 장관에 오른 기록은 한국사 전체에서 아마 그가 유일한 것이다.
남이의 운명은 예종의 즉위와 함께 비극으로 끝났다. 세조가 승하하기 15일 전 병조판서에 임명된 남이는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실각했다. 예종은 즉위 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발령했다. 직책의 무게상 좌천이 분명했다.
남이의 역모는 그로부터 한 달 뒤 발각되었다. 10월 24일 병조참지 유자광은 혜성이 나타나자 궁궐에서 숙직하던 남이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고 고변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혹독한 국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 사흘 뒤 저자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실록의 기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남이가 당시 정치에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역모로까지 발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작성된 여러 야사들은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하리.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뒤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부르리오" 남이가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지었다는 유명한 이 한시는 정치적 야망과 모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 같다. 이순신이 그랬듯, 그의 비극적 운명을 보면서 탁월한 무장에게 모반의 혐의는 어쩌면 숙명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인수대비,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린 날
지금도 '고부 관계'는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를 대표한다. 엄격한 의례와 복잡한 정치적 이해가 얽힌 조선 왕실에서 고부, 곧 대비와 왕비의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 그런 관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인수대비[소혜왕후]와 폐비 윤씨다. 널리 알 듯 인수대비는 성종의 어머니고, 폐비 윤 씨는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다. 책임 소재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관계는 며느리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인수대비는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거쳐 정난 1등 공신, 서원부원군에 책봉된 한확의 딸이다. 화려한 관력과 훈력에서 알 수 있듯 한확은 세조의 핵심 신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 한확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이때 받은 칭호가 인수대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인 수빈이다.
왕비 자리를 예약한 수빈의 행운 남편이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시동생인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붕어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잘살군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행운은 끝내 이뤄졌다. 이듬해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되자 수빈도 소혜왕후에 책봉되었으며 곧이어 인수대비로 높여졌다.
인수대비는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다고 한다.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해 정사를 청단하기 어렵지만, 수빈은 글을 알고 사리도 밝으니 감당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내훈]의 저술은 이런 칭찬이 큰 과장은 아님을 보여 준다. [내훈]은 1475년 인수대비가 부녀자의 훈육을 목적으로 펴낸 책이다. 그녀는 중국의 [열녀전], [소학], [명심보감] 등에서 유익한 구절을 뽑아 언행, 효친, 혼례, 부부 등의 항목으로 나눠 그 책을 만들었다.
68세까지 장수한 인수대비가 1504년[연산군10]에 사망했다는 사실에서 갑자사화와의 관련성을 예측했다면 그것은 옳다. 그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에 분노한 손자의 과격한 행동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 같은 비극을 불러온 이는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였다. 그녀는 판봉상시사를 지낸 윤기견의 딸이다.
윤씨의 비극은 폐비와 별거, 폐서인과 출궁을 거쳐 사사에 이르는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성종과 윤씨의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성종 8년 3월 말이었다. 윤씨가 후궁을 질투해 해치려는 목적에서 비상과 방양서[굿하는 방법을 적은 책]를 숨겨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성종과 정희왕후는 윤시를 엄벌하려 했지만 원자를 생각해 용서하자는 신하들의 만류로 윤씨를 빈으로 강등하고 따로 거처하게 했다.
별거를 시작한 지 2년 3개월 만에 좀 더 심각한 파국이 찾아왔다. 성종 10년 6월. 성종이 후궁의 침소에 들었을 때 윤씨가 불쑥 들어온 것이다. 성종은 윤씨가 후궁을 질투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을 독살할 의도까지 있다고 분노했다. 정희왕후와 인수대비도 적극 동의했다. 윤씨는 폐서인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감정의 앙금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야사에서는 성종이 윤씨의 행동을 염탐하러 보낸 내시로 하여금 인수대비에게 "윤씨는 예쁘게 단장하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13년 8월, 성종은 결국 "원자 때문에 어렵기는 하지만 훗날 반드시 발호할 우려가 있으니 대의로 결단해 예방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윤씨의 사사를 결정했다. 즉 국왕은 원자가 즉위했을 때 윤씨가 아들을 등에 업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방지하려고 그런 극단적 처사를 단행한 것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난 것은 윤씨의 비극적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성종의 불길한 예감은 그런 원인을 가혹하게 제거했지만 결국 들어맞고야 말았다.
연산군,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날
연산군은 조선의 대표적 폭군으로 평가되지만 즉위는 매우 순조로웠다. 그는 성종의 적정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고 12년간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유일한 결함은 모후가 사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물론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분명했지만, 암투와 치정이 난무하던 전근대의 궁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연산군은 이처럼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 원인을 분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주제는 삼사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아우르는 이 관서의 기본 업무는 국왕과 국정 전반에 대한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이었다. 그런 기능이 크게 강화된 것은 성종 중반이었다. 그때 이후 삼사는 국왕, 대신과 함께 중앙 정치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중요한 정치, 제도적 발전이었지만, 신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조선 왕정의 특징을 더욱 고착시키는 효과도 수반했다.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루어진 삼사의 대두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지상 목표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였다. 그는 이런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척결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능상을 단속하는 대상은 처음에는 삼사였지만, 점차 신하 전체로 확대되었다. 능상의 혐의가 번져 가는 과정은 폭정의 격화와 동일했다.
연산군 때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다. 두 사화를 관통한 주제는 능상의 척결이었지만, 그 양상과 결과는 상당히 달랐다. 무오사화의 직접적 발단은 세조를 비판한 김종직과 김일손의 불온한 문서'[조의제문]과 사초'였다. 숙청의 규모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52명으로 사형 6명, 유배 31명, 파직,좌천 등은 15명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 최초의 사화라는 거대한 상징성에서 예상되는 결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무오사화의 외형은 그것이 직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경고였음을 알려준다.
무오사화로 삼사는 일단 움츠러들었다. 왕정의 원리상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행사는 그리 잘못된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오사화까지 연산군의 통치는 일반적 수준에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 되었다. 국왕은 삼사를 제압해 확보한 왕권을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 목표에 사용하지 않고 사치, 음행, 사냥 같은 지엽적 사안에 집중했다. 이런 행동은 유례없는 폭정을 거쳐 끔찍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는 권력의 자의성과 자율성을 혼동하면서 전제 왕권의 몽상과 황음에 침윤되어가던 국왕이 행사한 폭력의 극점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 사건은 규모와 방식, 처벌 받은 사람의 성격과 결과 등 많은 측면에서 무오사화와 달랐다. 무엇보다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처벌되었고, 절반을 넘는 122명이 사형에 처해진 전면적이며 가혹한 숙청이었던 것이다.
하나 더 언급할 사항은 갑자사화가 폐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의 광기 어린 보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중대한 일을 국왕이 10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연산군은 즉위 직후 폐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아들의 비통한 마음을 깊이 보여 준다. 폐모 사건의 보복은 숙청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 사건의 본질적 원인이나 목표를 구성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핵심은 능상의 척결이었다. 폐모 사건은 선왕의 잘못된 판단을 막지 못해 자신을 참척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이유에서 가장 심각한 능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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