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할아버지(나폴레온 힐)는 연설을 하면서 노트를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사용하셨던 강연 노트에는 실제로 연설할 때 했던 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연설문을 책으로 만들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연설문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과정은 즐거운 일이기도 했지만, 기적 같은 일이었다.
찾아낸 연설문 중에는 1922년에 세일럼 대학(현, 세일럼 국제대학교)에서 행한 졸업식 축사가 포함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연설은 그 당시 지역 신문에 '무지개 끝에서'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는데, 다행히 사본이 세일럼 대학 기록 보관소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피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글을 복원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축복은 그 모습을 가장하고 항상 역경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1922년에 행한 졸업식 축사에서도 수 많은 실패들이 실제로는 큰 기회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강조하셨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실패가 결과적으로 큰 축복이 되었던 샘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 비결을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이 일하는 습관'에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성공의 쌍두마차가 되었다.
1922년에 졸업식 축사를 하셨던 세일럼 대학은 첫 번째 아내였던 플로렌스 할머니의 고향 럼버포트와 멀지 않은 웨스트버지니아에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세일럼에서 [나폴레온 힐 매거진]으 출판하는 출판업자이자 편집자로 활동하셨다. 할아버지는 여러 면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지마느 가족들에게만큼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10여 년 동안 계속된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있었다. 그래서 졸업식 축사는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완벽히 달성해 낼 수 있었다.
그날의 연설은 졸업생을 비롯한 청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자신의 실패 경험을 예로 들어 어떻게 역경을 극복해 냈는지를 감동적으로 풀어 낸 연설은 전설이 되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가족들 앞에도 당당히 나설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폴레온 힐 재단'의 이사인 돈 그린에게 이 연설의 사본을 보냈따. 돈은 즉시 성공 가능성을 알아보았고, 재단 기록 보관소에서 이 책에 수록할 관련 연설문과 신문기사들을 찾아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는 여러 해가 소요되었다.
'변화하는 세계'라는 신문기사는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 벽난로 장식 뒤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 당시,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 준 처가 식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처가살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1년 3월, 할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돌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워싱턴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하아버지는 사업을 시도할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결심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당시 할아버지는 무일푼의 빈털터리였기 때문이다.
왜 할아버지는 가족과 안정된 생활을 뒤로 하고 워싱턴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 이때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벽난로 장식 뒤에서 찾아낸 글을 읽어 봐야 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할아버지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거울과도 같다.
재단 이사 돈 그린은 할아버지의 초기 연설문-'1만 명을 분석한 후 알게 된 사실' 원고 사본 두 장을 찾아냈다. 한 장은 나폴레온 힐 재단 기록 보관소에 있었고, 다른 한 장은 1918년 2월 [모던 메소즈]에 게재된 기사였다. 할아버지는 이 연설문을 조지 워싱턴 대학교-현재, 시카고의 브라이언트 & 스트래턴 경영대학- 학장으로 재직할 때 썼다. - 훗날 할아버지는 이 대학의 비즈니스 광고학과 학과장 겸 대학 총장이 되었다. -
할아버지는 이 연설문에서 '성공의 다섯 가지 필수조건'으로 '자신감, 열정, 집중, 계획 세우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이 일하는 습관'이다. 이 조건들은 나중에 '성공의 3원칙-열정, 집중,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이 일하는 습관-'의 초안이 된다.
1952년 말, 할아버지는 클레멘트 스톤과 함께 활동하면서 아내 애니 로를 1년가량 떠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스톤과 함께 강연 흥행을 위해 전국을 순회했는데, 스톤이 기조연설을 맡곤 했다.
재단 이사 돈 그린은 할아버지의 기조연설 중에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찾아내 이 책에 수록했다. 이 연설문에는 할아버지가 즉흥 연설을 할 때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다. 독자들은 할아버지의 재치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연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950년대 중반, 할아버지는 강연가로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강연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방송되었고, 퍼시픽 국제대학교는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이른다. 1957년에는 세일럼 대학교에서 졸업식 축사를 다시 부탁하면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이 무렵 성공철학에 대한 할아버지의 생각은 잘 다듬어져 확고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세일럼 대학교에서 행한 졸업식 축사에서 '성공의 다섯 가지 필수 조건' 대신 성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인 '성공의 다섯 가지 핵심 요소'를 강연했다. 1922년의 졸업식 축사와 마찬가지로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후, 1922년에 발표했던 '성공의 다섯 가지 필수 조건'중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이 일하는 습관'만이 할아버지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다른 필수 조건들은 네 가지 필수적인 원리-마스터 마인드, 명확한 목표, 자기관리, 솔선수범-로 변경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연설문과 신문기사는 별개의 것이지만, 한데 묶으면 할아버지의 성공 철학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철학으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하나 개별적인 자료보다는 종합한 자료가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독자들은 이 책의 연설을 마음껏 활요하여 부를 얻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 바란다. - 나폴레온 힐의 손자 . 제임스 블레어 힐
1 무지개 끝에서 : 1922년, 세일럼 대학교 졸업식 축사
'무지개 끝에 황금 단지가 있다'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황금 단지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아마도 쉽게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오늘날의 경향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15년이란 세월 동안 무지개 너머에 있을 황금 단지를 쫓았습니다. 정말이지 쉼 없이 달렸습니다. 그저 황금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산에 오르기도 하고, 좌절도 하며 언덕을 구르기도 했습니다. '헛된 황금'이라는 환상은 그렇게 나를 흘려 놓았습니다.
어느 날 밤, 사람들과 함께 화롯불 앞에 모여 앉아 노동자 소요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진 마을에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노력이 결실이 맺기에는 조합원들의 노동운동이 너무 혁명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화롯불 옆에 나와 함께 서 있던 사람이 마침내 내가 따를 만한 최서의 의견을 제시하더군요.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어때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참 영리한 아이로구나. 교육을 잘 받는다면 세계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큰 영향을 받은 저는 즉시 일을 그만 두고 경영 전문학교에 등록하기로 했습니다. 돌이켜봐도 정말로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입학했던 경영 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큰 인물이 되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를 수료한 후 속기사 겸 회계사로 취업해서 몇 년 동안 일했습니다.
취업한 후에는 경영 전문학교에서 배운 '주어진 잉ㄹ보다 더 많이 일한다'는 정신으로 일했습니다. 그 결과 함께 입사한 동기들을 제치고 빠르게 승진했고, 급여 또한 자연스럽게 올랐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줄이면서 급여 대부분을 저축했습니다. 그 덕분으로 수천 달러의 목돈을 모을 수 있었고, 무지개의 끝을 향하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고, 저를 데려가려는 회사 간에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경쟁 회사에서 더 많은 급여를 제시하며 유혹했지만, 저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약점을 보완하려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지 덕분에 저는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강력한 성공 전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후, 저는 운명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기로 결심하고 대형 목재 회사로 옮겨 세일즈매니저 직함을 달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목재나 영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게 주언진 일보다 더 많이 일한다'는 원칙 말입니다. 목재를 팔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짧은 기간에 눈부신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해에 연봉은 두 배로 올랐고, 예금 통장은 해마다 늘어났습니다. 목재 세일즈 능력이 워낙 특출하다 보니, 사장이 회사를 하나 더 설립하면서 저를 동업자로 영입했습니다.
저는 무지개 끝 황금 단지에 한 발 더 다가서는 듯했습니다. 돈과 성공이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무지개 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공은 오직 돈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손은 나 자신이 매우 대단한 사람인마냥 허영심에 빠지게 했고, 자만심에 가득 차 허세를 부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사를 더 냉정한 눈을 볼 수 있고,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는 판단력으로 돌이켜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의도적으로 인간을 '허영심'이라는 막장으로 내몰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인간이 어떻게 허영심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속물 근성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어쨌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분명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창고 안에는 석탄이, 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습니다. 손을 밸브 위에 올려놓고 열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운명은 저 모퉁이 너머에서 저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퉁이 너머에는 나를 세차게 때릴 곤봉이 기다리고 있었고, 곤봉 속에는 폭신폭신한 솜이 아니라 무쇠 덩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듯 다가온 경제 대공황이 한순간에 저를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사장이자 동업자는 겁을집어 먹고 미리 사업을 정리한 덕분에 재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남은 것은 간판만 달고 있는 껍데기뿐인 회사였스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가 쌓아 놓은 평판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평판에 기대어 수백 수천 달러의 목재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남은 실낱같은 희망인 내 평판을 이용해 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와 무리들은 회사를 사들인 후 내 평판을 이용해서 목재를 외상으로 사들이더니, 그것을 다시 되파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와서 그들을 붙잡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경제 대공황과 사업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사업을 접고 법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업 실패를 제외하고는 제가 법학을 공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인생의 전환점은 실패의 날개를 달고 나에게 날아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모든 실패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업 실패 이후, 저는 '이번엔 실패하지 않고 반드시 무지개 끝에 도달해 황금 단지를 손에 넣고 말리라.' 다짐하며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 돈보다 더 강렬한 동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것은 항상 모래알처럼 내 손을 스르륵 빠져나가기만 했습니다. 마치 눈에는 보여도 결코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말이죠.
낮에는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밤에는 로스쿨을 다녔습니다. 목재 사업을 하며 익혀 둔 경험 덕분에 세일즈 실적을 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다시 빠르게 부를 쌓아가기 시작했고, 여전히 받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던군요. 앞으로는 자동차 산업에 전망이 있다고 판단한 저는 기계공들에게 자동차 조립과 정비를 가리치는 기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매달 어마어마한 돈이 통장으로 들어왔습니다. 또 다시 무지개 끝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발을 디디고 숨 쉴 만한 곳을 찾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사업 외에 내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던 중 거래하던 은행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제 사업이 급성장하는 것을 지켜본 은행장이 신용등급을 올려주면서 다른 사업에 투자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권하더군요. 저는 그 은행장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보증도 없이 서명만 받고 거액을 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장은 제가 빚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빚더미에 오르자 제 회사를 빼앗아 갔습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아주 드물게 행동하는 사람들, 특히 그 은행장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더 배워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실패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자동차를 여서 대나 가지고 있으며,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던 저는 한순간에 또 다시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무지개도 흐릿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실패야말로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계기로 나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한 번 짚고 넘어가면 좋은 법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회사를 은행에 빼앗기다시피 넘기고 몇 해가 지난 어느날, 선심을 쓰듯 돈을 마구 빌려 주던 워싱턴에 있는 그 은행을 호기심에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망했지만 은행은 여전히 성황리에 영업 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은행은 망해서 없어져 버렸더군요. 은행이 있던 건물을 바라보니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근처 길거리에서 거지가 되어비린 예전의 그 은행장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지개 너머에 있다는 그 황금 단지가 사실은 돈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제 처가는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최고 로펌에서 수석 변호사의 비서로 일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다른 직원들에 비해 꽤 높은 급여를 받았고, 그것은 내 능력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전형적인 낙하산이었고,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낙하산들이 으레 그렇듯, 저는 법률 분야에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경영 전문학교에서 배운 근본적인 원리를 다시 마음에 새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어려움 없이 로펌 업무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마음만 먹으면 평생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찰 만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돌연 로펌 일을 그만둔 것이지요.
나로서는 너무나 타당한 결정이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만둔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를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맡고 있던 일이 너무나 쉬웠기 때문이죠. 또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로펌에서 일하는 동안 '일상의 지루함'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로펌을 그만둔 일 또한 내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물론 안락한 세계를 내 발로 걸어 나온 이후 10년 동안 지옥을 맛봐야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인정하는 너무도 전도유망한 미래를 뒤로한 채, 로펌을 떠나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거 시카고를 선택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시카고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도시라고 막현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가면 무슨 일이든 하며 다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무엇보다도 언젠가는 실제 능력으로 드러날 내 안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홍보 매니저 직함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홍보 업무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예전의 세일즈 경험을 믿고 과감하게 도전했습니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한다'는 나만의 원칙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기 때문에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첫해에 대박을 터뜨리며 다시 상승 기류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내 눈에 다시 무지개가 들어오기 시작하던군요. 황금 단지에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부의 축적을 성공 기준으로 삼고 있었고, 그토록 원하던 무지개의 끝은 황금으로 가득한 단지를 약속해 줄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무지개 끝에 황금 단지가 아닌,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워 버렸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는 변치 않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정점에 있을 때 내리막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는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면, 내리막길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홍보 매니저로서 탁월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사장은 저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훗날 제가 '뱃시 로스 제과회사'를 설립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경영자가 되었고, 이 일은 내 인생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전환점이자 실패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은 성공을 거듭하며 다른 도시에도 많은 가맹점을 거느린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무지개가 다시 제게 드리워지는가 싶더군요. 마침내 영원히 지키고 싶은 회사를 만들었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제 회사는 친구가 근무하는 제과회사를 벤치마킹한 것이었고, 제가 사업을 시작할 때 그 친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잘 되던 사업은 제 동료가 다른 사람과 짜고 나를 속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실수가 현실이 되어 깨닫는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곤 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실수에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가 따릅니다.
고난이 나에게 준 것
내 동료가 다른 사람과 합세해서 나를 농간하며 골탕을 먹이더군요. 하지만 저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회사에서 나를 쫓아내려고 없는 사실을 허위로 만들어 고소했습니다. 내가 순순히 회사를 포기하면 소송까지 가지 않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칼에 거절했고, 법으로 맞대응했습니다. 그런데 재판 당일에 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담당 판사에게 그들을 소환해서 고소 내용을 진술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관계를 파악한 판사는 재판을 중단하고 이렇게 파렴치한 사건은 처음 본다면서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악의적으로 내 며예를 훼손하고 손해를 끼친 그들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면서 손해배상금 5만 달러를 청구했습니다. 이 소송은 5년 후에 재판이 열렸는데, 시카고 상급 법원에서는 불법행위로 인해 타인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한 것에 해당하므로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소송이 진행되된 5년 동안 법정에서 승리한 것보다 더 짜릿한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속인 자들 중 한명이 소송에서 패하기도 전에 또 다른 범죄 행위로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인생의 정점에서 가난과 불명예를 안고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법적인 옹호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이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깨닫는 순간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고 싶다는 적의가 사라졌습니다. 이후 그들에게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책과 회한이라는 벌을 받았으니까요. 욕망에 눈이 멀어 나를 속인 자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을거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불변의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후로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결국 정의로운 사람의 손을 들어 줄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적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했던 예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르침
이번에는 제가 무지개 끝에 가장 가까이 다갔던 시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그때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야말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고, 이른 나이에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광고, 홍보와 세일즈를 가르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철학자들은 말하곤 합니다. 제가 실제로 가르치는 이방이 되고 보니, 그 말은 분명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설립한 학교는 처음부터 운영이 잘 되었습니다. 기술학교와 통신학교 두 곳을 운영했는데, 대부분 영어권 국가 출신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세계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된 후였는데도 학교는 순풍을 만난 듯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무지개 끝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가까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황금 단지가 거의 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실적과 명성을 알아보고 대기업 회장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한 달에 3주만 일하면 105,200달러의 연봉을 주겠노라고 제안해 왔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받는 연봉을 뛰어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저는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났을 즈음 미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기업으로 변모시켰습니다. 회사의 자산 규모는 설립 초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저였다면, 무지개 끝에 도달했다고 맏을 만하지 않을까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끔찍한 사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회장이 저 몰래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던 거입니다. 그를 믿었던 저는 부정한 관리자가 되어 있었던 거죠. 저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부정한 사람들이 어떤 파국을 맞는지 잘 알고 있던 터라, 이 일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와 작성한 내 근로계약서에는 1년 동안 수석 관리자로 일해야만 연봉 10만 달러를 지급한다는 조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회장의 비리를 누치 챈 것은 입사하고 나서 6개월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6개월 동안이나 권력에 취한 사람의 손아귀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던 거죠. 그에게 곧 닥칠 파국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서 연민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법적인 책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윤리적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즉시 회장에서 요구했습니다. 회사 공금을 자금 담당이사에게 맡겨 투명하게 경영하지 않는다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최후통첩을 한 것이죠. 하지만 회장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더군요. 그는 내 책임도 아닌 일 때문에 계약을 깨고 10만 달러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고 오판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저는 결국 회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래도 회사 자금이 회장 손에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서 놓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 일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지만, 회장의 비웃음과 함께 10만 달러를 날리고 말았습니다.
이 순간 내 무지개는 희미해졌고, 내 손에 닿기엔 너무멀리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체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었고, 인생과 돈을 희생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인생 최고의 순간인 무지개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고, 지난 모든 실패와 전환점에서 배운 교훈들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려 합니다. 그에 앞서 대망의 마지막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때는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이 체결된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와인에 취한 사람처럼 벅찬 기쁨에 흠뻑 취해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사업 손실로빈털터리 상태였습니다. 사실상 거지와 다를 바 없었지만, 학살의 시대가 끝나고 이성이 다시 한 번 인류에게 찾아와 우리를 이롭게 할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제가 운영하던 학교마저 앗아갔습니다. 학생들이 징집되면서 연간 15,000달러에 달하던 수입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앞으로 영원히 무지개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이었죠. 제가 꿈꾸었던 무지개는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20년 전 탄광 노동자로 일할 때, 늙은 광부가 "너는 참 영리하구나. 너 같은 아이가 학교에 있지 않고 여기서 1달러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된 일이구나"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던 그 시절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와 내 꿈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생겨 꿈을 이루는 건 불가능할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시절의 탄광 노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해피엔딩
그러나 다시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혹시 내가 무지개 끝에 와 있으면서도 바보처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타자기 앞에 앉았습니다. 놀랍게도 내 손가락들이 자판 위에서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자를 치는 속도가 어떻게나 빠르고 경쾌하던지, 그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쓰고 또 써 내려갔습니다.
다듬고 다듬어 완성된 글은 모두 다섯 장이었습니다. 글을 쓰겠다고 계획한 적도 없는데, 정말 뜻밖의 결과였지요. 이 글은 훗날 제가 발행한 첫 번째 잡지인 [나폴레온 힐의 골든 룰 매거진]의 사설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들고 어떤 부자를 찾아가 읽어 주었습니다. 제가 글을 다 읽기도 전에 그는 잡지에 투자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얼떨결에 아주 극적으로 내 꿈에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탄광 노동자로 일할 때, 늙은 광부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내 앞날을 예언했던 그날로부터 20년을 돌고 돌아온 길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골든 룰'이 최고의 지침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래서 저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고 있다면, 이 질문데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비슷한 것들끼리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원리입니다. 즉 마음에 가득 찬 생가기 그 성질에 따라 그 사람에게 친구를 데려다 줄 수도 있고, 적을 끌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마음에 나쁜 생각을 담으면 안 되고, 나쁜 마음을 가득 채워 놓고서 친구가 생기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저는 '골든 룰'을 전파하기 위해 그에 부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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