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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ang 독서노트] 인간 정도전

독서노트

by C.Sang 2020. 11. 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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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정도전'

비명에 죽이당하기 3년 전, 그러니까 1395년 10월 어느 날 밤, 새 나라, 새 수도, 새 궁전(경복궁)에서 정도전이 창작한 (문덕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한 무녀가 춤추며 나아가, "문덕곡은 문덕과 무공을 노래하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라 다스리고 백성 구제하는 법 세웠네~" 하면서 치어(송덕의 노래)를 부른다. 치어가 끝나자 음악이 계속 연주된다. 네 명의 무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여미고 발구름 동작을 하며 춤추다가, "천명 받은 성인이 나는 용을 잡아타니 인걸이 구름처럼 몰려와 따르는도다~"하고 보공신장을 부른다. 음악이 끝나면 무녀들은 엎드려 절하고 물러난다. 또 무녀 넷이 북쪽을 향해 춤추다가, "국법이 무너지고 예절을 못 다음어, 강자 약자 서로 병탄, 너나없이 망했거늘, 우리 임금 바로잡아 비로소 구제되니 창고에 곡식 차고 백성이 편안해라~"하고 정경계장을 부른다.
이때 태조 이성계가 감격에 겨워 정도전을 지목한다. "이 노래는 경이 지어 올린 것이 아닌가", "이 새로운 수도 한양 도성, 이 새 궁전 경복궁도 졍의 작품이 아닌가", "이 새 나라 조선도 그대의 업적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의 주역이 그대 아닌가", "경이 마땅히 일어나 춤추어야겠소" 하고 춤을 권한다. 그러자 정도전이 일어나 자신이 만든 악장(문덕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피와 땀을 다 쏟았듯이, 정도전은 웃옷까지 벗어젖힌 채, 새 왕조 창업의 의미를 곱씹으며 춤을 추고 있다. 천심과 민심에 교감하듯,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혼신을 다해 춤을 추고 있다. 북쪽을 향하여 돌아서서 춤추고, 손을 모았다 다시 내밀고, 발을 모았다가 구르는 동작 사이로, "만백성의 화락을 천추로 누리리라~~아, 만백성의 화락을 천추로 누리리라~~"는 악공들의 노래 소리가 이어진다.
새 시대를 향한 울림과 떨림이 정도전의 춤사위에 녹아든다. "공 이루고 다스려져 무극과 짝하리라~아, 공 이루고 다스려져 무극과 짝하리라~~"-[삼봉집]권2,[문덕곡]- 음악이 그치려는지 여음이 가늘게 흔들려 소리를 끌었다.
그때 나이 54세, 재상의 신분으로 웃옷을 벗고 어린아이처럼 춤추고 있는 '인간 정도전'의 모습이 아름답다. 3년 뒤 자신의 육체적 명운이 다할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이 순간만큼은 '천진난만'하게 발을 구르고 손을 뻗치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춤추는 인간 정도전'의 모습이 어쩌면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는 지금 몸으로 절망의 시대를 뛰어넘어 새 시대를 실연하고 있는 것이다. 새 시대의 새 노래가 그의 몸을 통해 '희망의 언어'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필자는 이렇게 땀냄새 나는 '인간 정도전'이 그립다.
도처에 정도전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다. 오리지널로 찾아낸 정도전 이야기가 하나라면, 이것이 열 가지 스무 가지로 뻥튀기하여 돌아 다니고 있다. 알맹이는 하나인데ㅡ 소설로 분칠하고, 대중서로 분칠하고, 심지어 현대 자본주의 경영전략으로 분칠하여 돌아다니는 껍데기들이 시류를 등에 업고 넘쳐나고 있다. 마치 화장술 경쟁이라도 하듯, 정조전을 대상으로 한 역사소설은 물론이거니와 대중적인 역사서, 심지어 학자들의 전공 논문에서까지 거두절미한 이야기들이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인간 정도전의 내면세계에 주목해 왔다. 몇 년 전에 청년 정도전의 삶과 꿈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삼봉집]의 재문에 속해 있던 도깨비 이야기를 가지고 정도전의 내면 심리 세계를 이해하는 거울로 사용한 적이 있다.
정도전은 우왕 원년(1375) 5월에 유배되어 우왕 3년(1377년) 7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나주에 있는 거평부곡의 소재동에서 지냈는데, 그 때 도깨비에게 감사하는 글 (사이매문)을 썼다. 이 글에는 인간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겪고 있었던 고독과 비애, 괴로움 등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약한 측면이 도깨비를 통해 감추어져 있었고, 정체성의 위기와 갈등이 도깨비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이처럼 유배라는 상황 속에서 청년 정도전이 겪고 있었던 내면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뛰어난 자료였지만, 이 글이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서 재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필자의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삼봉 정도전의 도깨비에 관한 이 글(사이매문)은 문학 쪽에서 우언문학으로 언급된 적이 있을 뿐, 역사 쪽이나 정치사상 쪽에서 이 글을 사료로 인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의 논문이 나가고 나서 슬금슬금 역사나 정치 사상쪽에서 이 글을 자신들이 발견한 것 마냥, 정도전 유배기의 묘사에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버젓이 대중적인 역사서라는 정도전 이야기에 '도깨비 이야기'가 독립적인 장으로 등장하고, 필자의 논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고유한 표현까지 그대로 자신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 마냥 서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전공 논문이 아닌 대중서이고 뒤에 참고 논문으로 밝혀 놓았다고 변명하겠지만, 정도전에게 직접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닌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서 대중적인 책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단언컨대, 시중에 떠도는 정도전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짜깁기로 이루어졌다면, 그 책들을 통해 우리가 정도전의 껍데기에는 접할지언정 정도전의 알맹이를 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삶과 관련한 이야기는 결코 짜깁기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그때 그때 짜깁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년기는 소년기를 낳고, 소년기는 청년기를 거치면서 삶의 계기적 연속성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인간의 삶은 여기저기서 부분 부분 카피하여 퍼즐을 하나로 맞추었다고 해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짜깁기 된 이야기에는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의 굴곡이 쌓여서 토해내는 삶의 역동성이 없다. 정도전의 껍데기만 부여잡고 헐떡거릴 뿐, 인간 정조전의 삶의 알맹이에 갚숙이 들어가 그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그의 삶을 체험적으로 느낄 수 없다.
이미 나와 있는 정도전에 대한 뛰어난 학술서에서도 이러한 아쉬움이 있다. 정도전이 쓴 글만 가지고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분석하다 보니까 '위인 정도전'은 멀찍이 보이는데,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 정도전'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싶어하다보니까, 어떤 역사적 인물을 내세울 때 '교훈'만이 남고 '인간'은 사라져서, 그를 '안다'고는 하지만 그를 '느끼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적으로 아는 삼봉 정도전이 이 시대 우리 인간의 연약한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 시대의 모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고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인도덕군자'처럼 역사에서 교훈만 가르치려들고 있지는 않은가?
정작 정도전 연구를 할 때에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남기(삼봉집)을 가지고서 연구를 했는데, 막상 연구가 끝나고 나니까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삼봉 정도전은 없어지는 연구들이 안타까웠다. 마치 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는 딱딱한 하나의 완성된 동상처럼, 역사의 위인이라고 해서 우리 보통의 인간들과는 무관하게 교훈만 주려고 다가오는 역사 인물 연구 방법에 공감할 수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아픔과 연약함을 우리처럼 똑같이 겪으면서 우리처럼 시험에 넘어지기도 하고, 또 끙끙거리면서 일어나 그걸 극복하고 이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그런 삼봉 정도전을 대면하고 싶었다. 진정 땀냄새 나는 '인간 정도전'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 삼봉 정도전은 죽어 있다. 지금 삼봉은 죽어 있고 우리한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삼봉집밖에 없다. 연구자들은 이 삼봉집을 죽은 텍스트로 하여 인간 정도전의 아픔과 무관하게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마냥 삼봉집을 이렇게 해부하고 저렇게 분석한다.
삼봉 정도전은 일찍이 자신의 글을 그 시대와 연관하여 살아 있는 말로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내면을 밝힐 수 있는 글들을 그 시대와 연관하여 들을 수 있도록, 시가 되었든 제문이 되었든 그 글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쓰여졌는지를 밝혀 두었다. 그리하여 짜깁기로 필요한 부분만 따서 '읽지'말고, 삼봉 자신의 글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일련의 진술로 '들어주기'를 원한다. 마치 연구자들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마냥, 제3자가 되어 산 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삼봉 자신의 텍스트를 이렇게 저렇게 분석하면서 연구자의 권위를 내세워 설명하려 들지 말고, 삼봉 자신이 들려주고 싶어 하는 방향을 따라서 그 텍스트에 의해서 개방되는 사유의 길 위에 다소곳이 함께하기를 원한다.
진정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 정도전을 이해하고 느끼고 싶어서 쓰여졌다. 우리가 정도전에게서 읽고 싶어 하는 것을 읽어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연약한 인간으로 똑같이 아파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그 자신의 이야기에 참여하기 위해 (그래서 함께하기 위해) 쓰여졌다. 인간 정도전의 삶을 '설명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그를 '이해하기'위해, 우리는 제3자가 되어 멀찌감치 산 위에 '권위자'처럼 서있을 것이 아니라, 그의 텍스트 '아래에' 다소곳이 귀 기울여 '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 다함께 그의 내면세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Ø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단양 삼봉을 가리켜 삼봉이라 했고, 도전이란 이름도 도를 전한다는 유교적인 뜻이 담긴 것일 수도 있고, 삼봉이라는 호는 단양의 삼봉보다 개경 부근의 삼각산에서 빌려왔을 가능성도 높다.


고려 말, 충렬왕 15년(1289년)에 안향은 원에 입조하여, 주자의 책을 처음 얻어 보았고, 다음 해에 귀국할 때 주자의 책과 공자, 주자의 초상을 모사하여 돌아왔다. 안향이 충렬왕 16년 무렵에 주자학을 들여왔다는 견해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자학을 공자 학문의 진수로 보고 그것을 국자감의 젊은 학생들에게 배우도록 권하였다.
'성인의 도는 일용윤리에 지나지 않으니, 아들이 되어 효도해야 되고 신하가 되어 충성해야 하며 예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신으로써 벗과 사귀며 자기를 닦는 데는 경으로써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는 반드시 성으로써 할 뿐이다. 저 불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하여 윤리를 업신여기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니 곧 이적의 무리이다. 근래 전쟁에 시달린 나머지 학교가 퇴폐하고, 선비는 학문을 몰라, 배운다는 것이 고작 불서나 즐겨 읽고, 그 허무공적한 뜻을 믿으니 심히 가슴 아파하는 바다.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회암[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의 학을 배척한 공이 족히 공자에 짝할만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도를 배우고자 할진대는 회암을 배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들은 신서를 읽음에 힘써 게으름이 없을지어다' -안향,[회헌집]-



정도전,
유배 첫 해인 1375년 12월,
34세 때 쓴 [심문천답]이라는 글

사람의 마음속의 이치는 바로 상제의 명한 바이나, 그 의리의 공변된 것이 혹은 물욕의 가린 바가 되고, 그 선악의 보응이 또한 전도된 것이 있어 선하여도 혹 화를 얻고 악하여도 혹 복을 얻어, 선을 복주고 악을 벌주는 이치가 분명하지 못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착한 것을 좇고 악한 것을 버릴 줄 알지 못하고 오직 공리에 나가기만 힘쓸 뿐이니, 이는 사람이 하늘에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마음의 주재에 의탁하여 상제에게 물어 질정하는 것이다. ..... 급기야 보응에 이르러서는 일이 거꾸로 되는 일이 많았다. 배반한 자는 장수하고 하늘의 명을 따르는 자는 요절하며, 하늘을 좇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신의 하는 일을 허물하여 신의 명령을 좇지 않고 오직 적을 따를 뿐이다. "황한 상제가 진실로 하민을 주재하시는데 시와 종이 어찌하여 어긋나며, 주고 빼앗는 것이 어쩌하여 편벽됩니까? 신이 비록 비루하고 어리석으나 의혹하는 바입니다." [이 장은 가설적으로 내 마음의 주재하는 영이 상제의 뜰에 조회하여 신이라 칭하고 물은 것을 말한 것이다.] -[삼봉집],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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