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저명한 역사학자 한영우 박사는 15세기의 세종, 18세기의 정조를 조선 최고의 지도자로 뽑는다. 그리고 그는 우리 역사가 300년을 주기로 르네상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곧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여 르네상스를 부활시켜 줄 21세기의 위대한 지도자가 출현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국가의 대업을 달성해야 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최근의 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탕평 인사와 개혁 정치로 대통합을 추구한 정조의 위대한 리더십을 부활시켜 후세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과 사명감을 필자는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정조에 주목하여 그와 관련된 저서 27권을 연구, 검토해 보니 필자는 정조야말로 탕평 인사와 개혁 정치로 국가적 통합을 성공시켜 조선을 찬란한 문화 국가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시대가 지날수록 정조는 세종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고, 그의 죽음도 독살설에 힘이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그동안의 정조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소극적이고 비관적으로 이루어진데 반하여 필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기술하기로 했다. 정조 사후 위대했던 조선은 세도정치와 민란 등으로 100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지만, 정조 같은 지도자가 계속 조선을 이끌었다면 한일합방 같은 민족적 치욕도 없었을 것이고 근대 민주 국가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놀랄만한 점은 정조의 '노비제도혁파 안'은 링컨의 '흑인 노예 해방령'보다 훨신 빨랐으며, 생명을 중시하고 인간적인 정조의 따스한 리더십은 서양의 마키아벨리즘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정조는 과감하게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한 독창적 문화국가, 부강한 근대국가를 향해 달려간 지도자였다. 특히 정조는 신분이나 문벌보다는 학식이나 능력에 기준을 두어 과감하게 인재를 발굴, 육성하여 탕평 인사와 개혁 정치로 정치를 성공시킨 지도자였다. 정조는 통찰력과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관용과 인내심이 대단한 성공한 지도자였다. 위대한 지도자 정조의 꿈은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리더십을 부활시켜 현재의 절망적인 정치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키워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몫이고 역사적 과업일 것이다.
제1장 정조의 출생과 성장
P.13
(영조 36년-1760년- 1월에도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소학]을 설명해 보도록 한 후 [소학]의 앞부분에 나오는 '물 뿌리고 먼지를 쓰는 것'의 뜻을 물었다. 이에 세손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쓸기에 앞서 물을 뿌리는 것은 먼지가 어른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고 답하였다. 이 답에 영조는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
Ø 소학은 충효의 덕목을 중시하고 있었고, 또한 영조는 소학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낟.
애증의 관계의 있는 두 사람은 부자지간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의 자리를 함께 차지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영조는 소론을 따르는 아들 사도세자가 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경계해야 했다. 바야흐로 부자간의 정면충돌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정한 권력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Ø 삼정승의 연쇄자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사도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연달아 자결했다.
Ø 거대한 노론 세력들은 영조를 움직이기 위해 미천한 나경언을 매수하여 사도세자에게 치명적인 '비행 10조목'을 그럴듯하게 조작하여 직접 영조에게 상소하고 나섰던 것이다.
비극적인 임오년(1762년, 영조38년)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자기의 비극적인 최후를 예견한 듯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내가 무사하지 못할 듯 하고... 내가 없어도 세손이 있으며...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을 것 같소."
P.25
때는 오전 10시경으로 햇볕이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휘경전 앞마당에 엎드려 있던 사도세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힘들어 했고, 따라서 병이 깊어 가는 듯 했다. 이런 사실을 관리들이 영조에게 걱정하며 보고했으나 영조는 이를 아예 무시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호통을 치며 "내가 죽으면 300년 종묘사직이 망하지만 네가 죽으면 오히려 종묘사직은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조는 들고 있던 칼로 직접 세자를 찌르려 했다. 이제 영조와 사도세자는 더 이상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너 스스로 자결하여라"고 외치자 "저를 찔러도 좋으니 이제 죽여주십시오"라고 맞섰다. 영조는 "저 말하는 것 좀 보아라. 얼마나 흉악한가?"라고 하자 사도세자는 "저의 마음에는 지극한 원통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상황에 사도세자를 살리려 애쓴 관리들은 세손(정조)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참혹한 비극을 담은 뒤주는 선인문 안마당에 놓여졌다. 영조는 옥당 홍낙순과 포장 구선복을 시켜 사도세자가 든 뒤주를 지키게 하였다. 영조는 뒤주문을 끝내 열어주지 않았고,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숨을 거뒀다. 이때 사도세자는 28세로 충분히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나이였다. 사도세자의 죽음 비극적인 가족사처럼 보이자만 1762년(영조38년)정순왕후, 그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의 모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는 노론 일파에 의해 희생되었다.
훗날 정조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의 흉계에 빠져 희생되었다고 확신했다. 많은 기록을 참고하여 판단해보면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최후는 아버지와 아들의 첨예한 갈등으로 인한 가족사라기 보다는 노론과 소론 간 세력의 권력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62년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은 사건
갑신처분이란 가혹한 결정을 한 영조는 세손을 불러 잔인할 정도로 다짐을 받고자 다그쳤다.
"훗날 신하들 가운데 혹 이 일을 가지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옳겠는가? 그르겠는가?"
"그릅니다."
영조는 미덥지 못했는지 다시 다그쳐 묻는다.
"군자이겠는가? 소인이겠는가?"
"소인일 것입니다."
이에 할어버지 영조는 사관을 불러 방금 세손이 한 말을 정확히 기록해 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세손의 외할아버지이며 영의저인 홍봉한이 앞날이 걱정되어 영조에게 다짐을 받아내려 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봉한은 앞날이 무척 두려웠다. 장차 세손이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분명히 물을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영조에게 묻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세손도 이미 알고 있고 저의 할머니와 어머니도 알고 있는데 후에 다른 말을 할 것인가?"라며 앞날을 걱정하는 영의정 홍봉한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내심 홍봉한은 앞날이 걱정되고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과연 훗날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와 한 약속을 지킬 것인가?
P.38
영조의 대를 이어야 할 동궁의 지위에 있던 세손은 사도세자처럼 모함에 의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시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학문에 몰두하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압박해 오는 세력과 그들의 하수인인 내관과 궁녀들의 감시 속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공급하는 액정서의 하인들까지 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세작이 되어 있었다.
이때가 1776년 3월, 그의 나이 83세였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51년 7개월), 또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세손은 11세였다.
당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영조와 홍봉한 등의 보호막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정적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끝까지 대항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은 홍국영이었다. 또한 호국영의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정민시도 세손을 보호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야흐로 세손은 험난한 가시밭길과도 같은 권력 세계에서 24세의 나이로 군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제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과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21대)는 이복형인 경종(20대)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받으며 왕위를 계승했지만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을 혁파하고자 탕평정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애를 썼다. 그리하여 집권 전반기에는 강력한 탕평정책이 성공하여 민생안정이 이루어지고 사회 전반에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는 등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이에 영조는 탕평정책을 더욱 확대하여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사색당파를 고루 과감하게 등용하여 성공적으로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안정된 탕평정책에 반기를 들고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꾸민 계략이 사도세자를 죽인 1762년 '임호화변'이었다. 거대한 노론 일파의 술책에 말려든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역적으로 몰기까지 하여 큰 과오를 저질렀다. 또한 세손을 역적의 아들로 만들 수가 없다고 하여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무리하게 입적시킨 '갑신처분'을 단행했다. 영조는 집권 전반기에는 철저한 탕평정책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어 태평성대라 할만 했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노론의 득세로 인한 횡포와 영조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불안한 정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결국 영조는 세손에게 형용키 어려운 분노와 개혁에의 열망을 심어줬다.
존현각 침입 사건
정조를 시해하려고 했던 '존현각 침입 사건'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초유의 임금 피습사건이었다. 1777년(정조1년) 7월 28일 정조는 경희궁 내 침소인 존현각에서 촛불을 켜놓고 밤늦도록 책을 보고 있었다. 왕에 즉위한 이듬해였고, 존현각은 경희궁에 딸린 전각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었다. 정조는 그가 애착을 느끼는 존현각에서 매일 같이 일과 후에 책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날 정조는 홀로 책을 보고 있었고, 내시에게 호위 병사들이 제대로 보초를 잘 서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였다. 잠시 후 책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존현각 대문인 보장문 동북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들려오기 시자갰다. 무예로 단련된 정조는 본능적으로 자객이 침입했다는 것을 느꼈다. 자객들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가 용마루의 기와를 부수고 기와조각을 방 아래로 던진 뒤 기와 아래 있던 모래가루를 흩뿌렸다. 정조에게 겁도 주고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었으리라, 뒤이어 자객들은 곧장 방 안으로 내려가 정조를 시해하려 했으나, 정조의 민첩한 대응 자세에 놀라서 황급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곧바로 병사들을 불러 모아 지붕 위를 살펴보게 하고, 도승지 홍국영으로 하여금 철저히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국왕을 시해하기 위해 왕의 처소인 경희궁 존현각까지 자객들을 침입한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발생한 일로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홍국영이 부하들을 이끌고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자객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열흘 정도가 지난 8월 11일 밤 자객들은 대담하게도 다시 침입하였다. 이미 정조는 그 사건 이후 처소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상태였다. 다시 이들은 정조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 경추문 쪽으로 넘으려다가 호위군들에게 붙잡혔다. 체포된 인물은 전흥문이라는 자로 소문난 장사였다. 지난 7월 28일에 강용휘라는 자와 함께 존현각을 침범했던 장본이었다. 분노한 정조는 심야에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 뒤에 있는 숙장문 앞에서 친국을 했다. 정조의 무서운 기세에 위축된 전흥문은 사건의 전모를 실토했다.
7월 28일의 '거사'는 강용휘가 앞장섰다고 했다. 강용휘는 표창을 숨기고 전흥문은 칼을 들고 존현각으로 침입했다. 밖에서는 주동자 홍상범이 도성의 무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주의를 살펴보고 있었다. 존현각 근처에서 강용휘는 강계창이라는 별감과 강월혜라는 궁중 나인에게 무엇인가를 조용히 확인하고 서서히 존현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민첩한 대응으로 호위군관들이 불을 밝히며 몰려들자 두 사람은 서둘러 존현각 지붕에서 내려와 보루각 뒤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날이 새고 나서야 강용휘는 금천교를 거쳐 수문통을 제치고 탈출했고 전흥문은 흥원문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들은 주동자 홍상범의 집에 모여 재차 거사를 도모하여 이날 침입하려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홍계능이 반정계획을 수립하여 홍인한, 정후겸의 복수도 갚고, 새로운 왕으로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고 한 역모사건이었다.
홍국영의 몰락
1780년(정조4년),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 발각되었다. 홍국영은 자기의 여동생 원빈 홍씨를 효의왕후가 죽였다고 믿고 그녀를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 전에 넣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홍국영의 권세가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여서 이를 눈치 챈 신하들 모두가 모른 척 했지만 연원한 비밀은 없었다. 정조도 신하들이 입을 다물었으니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고 더구나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독살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개혁적인 사헌부와 사간원의 젊은 관리들은 홍국영이 세도정치를 계속해서 해나간다면 새로이 조선을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나서 그의 비리를 밝히고,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너무나 아꼈고 아울러 자신의 모든 권력을 넘겨주었던 그가, 나라의 국모이자 자신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충격을 넘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배신 행위였다.
정감록이란 조선시대에 변혁을 꿈꾸는 자들이 항상 품고 다니는, 일종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다. 정감록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과 조선 멸망 후 새로운 나라를 세울,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있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정감의 말을 토대로 기술되었다고 해서 정감록이라 부른다.
대소 신료들은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사형으로 엄하게 처벌할 것을 정조에게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대소 신료들을 설득하여 무조건 사형을 집행하기 보다는 이들을 깨우쳐 새로운 마음으로 국가에 충성하도록 조치할 것을 명했다.
"죄가 있는 자는 은혜를 생각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죄가 없는 자는 의심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혀 다 같이 새로운 교화 속에 들어가 이 경사의 기쁨을 함께 한다면 그들도 다행일 뿐 아니라 국가도 다행이다."
"아, 내가 왕위에 오른 지 6년이 되었으나 정치와 교화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개과천선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고, 죄를 지은 자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감옥이 텅텅 비는 교화를 기대할 수 없다. 죄수를 보고 수레에서 내려 눈물짓는 일만 자주 하게 되었으니 내 거듭 부끄러워 탄식하고 있다."
위민정치를 추구하는 지도자로서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엄벌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바꿔 교화하며 포용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정조는 정감록 역모사건 이후 10여일 정도가 지난 12월 3일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무려 대사장가 3.137명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이미 먼저 죽은 한익모, 장지항과 신회를 사면했다. 또 홍국영과 노론의 요청으로 단행했던 윤선거, 윤증 부자에 대한 관작추탈을 취소했다. 그들은 소론의 거두였다. 이는 앞으로 소론을 끌어안아 정치적 탕평을 하겠다는 신호였다. 그 밖에도 주요 사건에 관계되어 귀양을 가 있던 인물 대부분을 사면했다.
이처럼 정조 집권 전반기에 많은 역모사건으로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으나, 정조는 인내심과 설득력을 발휘하여 최대한 관용을 베풀며 한 명이라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역모 사건들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면 정조는 관용과 인내심을 겸비한 지도자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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